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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각자의 소중한 양심을 위하여

by eunic 2005. 12. 27.
각자의 소중한 양심을 위하여

군대 가면 ‘비양심’ 되는 것 아니냐고? 남북 대치 상황에서 병역거부는 안된다고?

김두식/ 한동대 법학부 교수 · 변호사

군법무관으로 입대하여 훈련이 끝나갈 무렵, 우리들 모두 가장 끔찍한 경우의 수로 생각했던 것은 특전여단 배치였다. 원래 군법무관은 장교 훈련만 끝나면 제대할 때까지 다시 훈련받을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특전여단에 배치되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공수훈련을 받고 낙하산을 타야 한다고 했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비행기에서 여러 번 뛰어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울 남부지법 앞에서 시위를 벌인 재향군인회.(사진/ 류우종 기자)

입대의 양심, 거부의 양심 모두 중요

결국 추첨을 통해 지지리도 운 없는 동료 몇명이 특전여단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한 장교가 웃음을 잃지 않고 “죽기야 하겠어요? 좋은 경험이죠 뭐.” 하며 농담을 계속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공부 면에서도 탁월했고, 운동도 잘했으며, 놀기도 잘하는 만능형 인간이었다. 그가 자원을 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떠돌았다. 우리는 이왕 누군가 가야 한다면 그 친구처럼 씩씩한 법무관이 가는 게 나을 거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금요일 방송을 듣다 보니 서울 남부지법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의 이름이 신기하게도 그 씩씩한 장교의 이름과 똑같았다. 바로 그 사람, 이정렬 판사였다.

서두에 굳이 판사 개인 신상을 늘어놓은 이유는 별게 아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도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기 시작하고, 특별히 병역거부 문제에 이르면 진보·보수를 떠나 모든 예비역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그런 나라이기 때문에 특전사 출신 예비역 장교라는 판사의 배경은 단순한 가십을 뛰어넘는 중요성을 지닌다.


△송두율 교수는 재판과정에서 양심을 심문당했다.(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물론 이번 판결은 양심의 자유를 내면에 한정하고 그 표현을 제한하는 데만 열심이던 법률가들의 양심에 경종을 울렸을 뿐 아니라, 대법원 판결을 ‘유일한 정답’으로 맹종하던 법원이 기존의 소극적 태도를 벗어나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진보적 매체의 여론조사까지도 반대 의견이 찬성의 네배에 이르는 척박한 토양에서, 그런 고상한 의미까지 곱씹고 있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군대도 안 갔다온 여호와의 증인 판사 아니냐?”는 수준 낮은 공격들은 일찌감치 꼬리를 내렸지만, 여전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인정된다면 군대 간 사람은 모두 비양심적이라는 말이냐?” “이제는 온 나라가 여호와의 증인들로 넘쳐날 것”이라는 식의 분노와 예언이 공론의 장을 채우는 상황인지라 간단하게라도 먼저 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한다고 해서 군대 간 사람들이 ‘비양심적 병역 복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양심적’(conscientious)이라는 영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양심적’이란 ‘자기 양심에 따라서’라는 의미다. 병역거부를 양심적인 것으로, 군복무를 비양심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표현이 결코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동안, 이정렬 판사 같은 사람은 자기 양심에 따라 특전여단에서 낙하산을 탔다. 양심이란 그런 것이다.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병역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양심 못지않게,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젊은이들의 양심 역시 소중한 것이다.

형평에 맞는 대체복무제를

둘째, 남북 대치라는 상황의 특수성을 거론하며 대체복무제 도입에 반대하는 분들이 간과하는 것은, ‘우리가 왜 북한과 대치하며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이유는 이 나라가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며, 그 자유 중 으뜸에 속하는 것이 양심의 자유이다. 남북 대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주장하는 것은, ‘숭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 자체를 포기하자’는 것밖에 안 된다. 이런 모순을 막기 위한 수단이 대체복무 제도이다.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군복무를 면제해주거나 모두를 감옥으로 보내는 극단적인 처방 대신, 두 헌법적 가치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제3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셋째, 젊은이들이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 되리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당신 같으면 일요일마다 2명씩 짝지어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며 전도하러 다니고, 각종 규율에 구속되며, 이단이라 손가락질당하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면서까지 군대를 피하겠느냐?”고 묻고 싶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병역 거부 말고도 수혈 거부, 국기에 대한 맹세 거부 등 여러 측면에서 이해받기 어려운 소수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온갖 난관을 이기고 군복무를 마쳤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병역 기피를 위해 서슴없이 자기 양심을 팔아 여호와의 증인이 될 것’이라 속단하는 예비역들의 확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궁금하다. 나는 이 나라에 이정렬 판사처럼 자기 양심에 따라 군복무에 나설 엄청나게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고 확신한다.


△서울 남부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병역거부자 정아무개(23·왼쪽)씨와 병역거부자들을 도와온 성우 양지운씨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 연합)

넷째, 우리는 지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조건 면제 처분을 해주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논의의 핵심은 그들로 하여금 대체복무를 통해 국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자는 데 있다. 감옥에 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그 양심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기간과 내용에 따라서는 군대보다 훨씬 심한 고생이 될 수도 있다. 이들에게 대체복무를 인정하는 것이 형평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면, 형평에 맞는 대체복무제를 마련하면 된다. 대체복무제는 병역거부자를 감옥으로 보내는 현행 제도보다 인력배치 면에서 효율적일 뿐 아니라, 양심 문제로 고민하는 일부 사병들로 인해 전선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전투력도 향상시킬 수 있다.

반대자들의 진짜 애국심을 바란다

대체복무제 반대자들은 대개 애국심이 남다른 분들이다. 나는 그분들의 애국심이 곧 지금의 수준을 뛰어넘게 되리라 믿는다. 남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상당한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다. 그 애국을 굳이 남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 특전사 출신의 이정렬 판사는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해병전우회처럼 강한 애국심을 특별한 자랑으로 삼는 예비역 단체들부터 대체복무제 도입운동에 앞장서주기를 바란다. 진짜 보수의 애국심과 사나이다움을 보여주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차원을 높여 형평에 맞는 대체복무제를 어떻게 마련할지, 그들의 진지함을 어떻게 심사할지 등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으면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북한, 중국, 베트남, 터키, 알제리, 페루, 칠레 수준의 이야기만 계속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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