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75세 이후의 삶이란 인간이 절멸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메리 파이퍼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를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아가다가
흔적 없이 사리지리라
.
황인숙 시인의 <자명한 산책>에 나오는 '노인'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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