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연극이 끝난 후 |
[한겨레]2004-09-01 02판 23면 1921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
화제의 풍자극 ‘환생 경제’의 동영상을 〈오마이뉴스〉에서 보고, 나는 여러 번 놀랐다. 비록 연극이기는 했어도, “불×값” “육××놈” “개×놈”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 같은 표현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데 우선 놀랐고, 품격 있는 정치를 강조해 온 한나라당 의원들이 그 공연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노골적인 표현 가운데 일부는 대본에 없었는데 준비기간이 짧아 대사를 제대로 못 외운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나온 것”이라는 어느 의원의 해명이었다.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족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자주, 그리고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대사들이 바로 그 ‘노골적인 표현들’이었다. 고졸 출신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온 ‘엘리트’ 국회의원들과 몇몇 우아한 대학교수 칼럼니스트들의 비판 방식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런 노골적인 표현을 무의식적으로 내뱉도록 만든 내면의 깊은 상처와 열등감이야말로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해도, 정치인들을 통해 그 본성을 매일처럼 확인해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정치가 무슨 ‘홍상수 영화’도 아닌 다음에야.이번 공연을 ‘논란’ 또는 ‘파문’으로 취급한 신문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건 논란이나 파문거리라기보다는 그저 ‘이야깃거리’ 정도로 족한 일과성 사건이었다. 평소 별것 아닌 일에 매번 ‘논란’이니 ‘파문’이니 하는 과장된 제목을 붙여가며 시민들을 호도해온 자칭 일등 신문이 유독 이번 사건만은 한나라당 연찬회의 ‘하이라이트’라며 적당히 넘어가주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그 신문의 부자연스러움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다. 오히려 ‘논란과 파문 부풀리기 전문 신문사’와 싸우는 동안,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그 신문사와 닮게 된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일이다. 신문사 자신이 문제제기의 진원지이면서도 ‘논란’과 ‘파문’의 제목을 달아 사안을 뻥튀기하는 잘못된 관행은 이쯤 해서 다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가뜩이나 유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우리 정치판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도 저질 코미디를 벗어나 한승헌 변호사처럼 깔끔한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많이 발굴했으면 한다. 클린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정치인의 기본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에 발끈했던 열린우리당이나 청와대도 마음의 평정을 찾아주기 바란다. 대통령이 그런 심악한 욕설의 대상이 되었으니 함께 일하는 처지에서 분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아마추어 연극에 대해서는 “재미있게 잘 보았다. 그래도 공중파를 타려면 표현을 좀 가다듬어야겠다” 정도의 여유 있는 논평이면 충분했다. 지금이 유신시대도 아닌데 굳이 “국가원수 모독” 같은 표현을 사용해 가며 흥분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다. 최근 ‘그 신문’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기는 해도, 역시 그런 표현은 그 신문에나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꼬리 잡아 상대방을 끝장내려는 저급한 정치도 이쯤 해서 중단하는 것이 옳고, 이왕이면 집권 세력 쪽이 솔선수범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다. 우리가 어렵게 한 걸음씩 내디뎌온 민주화의 성과를 이번 사건만큼 집약해 보여주기도 쉽지는 않다. 헌법을 압살한 유신 정권의 ‘퍼스트레이디’ 출신 당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야당 의원들이 이런 막나가는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민주주의의 값진 열매인 것이다. 물론 독재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하필 그 정당 구성원들이 민주화의 열매를 가장 달게 누리는 현실이 기막히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언론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 아니겠는가.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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