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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나는 감정의 서민

by eunic 2005. 12. 29.

노인

75세 이후의 삶이란 인간이 절멸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메리 파이퍼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를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아가다가

흔적 없이 사리지리라

.

황인숙 시인의 <자명한 산책>에 나오는 '노인'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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