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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김근태의 이상주의 이인화의 영웅주의 2

by eunic 2005. 8. 30.
그러나 장기간의 도피생활은 김근태에게 많은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피신 시절이던 어느 정월 대보름날 밤 은신처를 구하지 못한 김근태는 통금 시간에 쫓겨 도곡동의 한 갈대밭에서 밤새도록 제자리 뛰기를 하며 추위와 싸웠다. 그때 그의 머리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얼어죽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한다. 김근태가 그런 고통을 감내한 이유는 유신과 군사독재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좀더 안정되고 예측가능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부인 인재근씨와의 만남

그러나 1970년대에 김근태를 가장 어렵게 한 것 중의 하나는 생활을 해결하는 문제, 즉 경제문제였다. 김근태는 도피기간 중인 1978년 이화여대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고 있던 인재근씨를 만나 인천 부평의 한 설렁탕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신접살림을 꾸렸다.

그의 아내 인재근씨는 김근태에 못지 않은 민주투사다. 민가협의 초대 총무를 지냈고 서울민중운동연합(서민통) 상임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서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오히려 김근태의 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따름이지 지금도 그들 부부는 금배지를 달고 안달고의 차이밖에 없는 영원한 민주화 동지다. 인재근씨에 관해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인간탐구’에서 독립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녀는 그만큼 충분히 의미있고 특별한 삶을 살았다.

다시 1978년의 김근태로 돌아가자. 단칸셋방에서 살고 있던 그 해 연말 아내와 아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친구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때 김근태는 생전 처음으로 경제문제 때문에 비참한 심정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전태일 분신과 유신발생 이후 거의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무한정의 갈등이 밀려왔단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철저히 신봉하고 실천한 김근태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인천지역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노동자교육, 노동운동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그의 반유신 투쟁은 1979년 10·26까지 줄기차게 계속됐다.

김근태는 자신의 1980년대를 “매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로 회고한다. 1980년대는 김근태에게 운동가로서는 최고이자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고통을 안겨준 시절이다. 그는 1983년 9월 학생운동 출신들이 조직한 최초의 독자적이고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였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초대, 2대 의장을 맡는다. 이때부터 김근태는 항상 권력의 첫번째 기피인물이 되었다. 군부독재의 살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으니 불법단체인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겪었을 괴로움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날 안기부 국장을 만나러 나갔던 민청련의장 김근태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처참한 몰골로 집에 내동댕이쳐졌다. 부인 인재근씨의 말을 들어보자.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어요. 찢어지고 터지고, 코뼈는 부러진 것 같았고 눈썹 끝이 갈라져서 벌겋게 살이 드러나 있었지요. 그리고는 한 시간 이상이나 구토를 하더라구요.”

부인 인재근씨는 잠이 든 남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그 사진을 들고 안기부를 압박해 민청련을 공식화하는 데 성공한다. ‘부창부수(夫唱婦隨)’란 표현이 이런 때도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1985년 9월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민청련 의장 김근태를 공산당 지하조직의 총책 쯤으로 인식했다. 도표까지 곁들여진 김근태 관련기사의 조직도 맨 위쪽에 김근태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간 ‘말’이 폭로한 당시의 보도지침인 “김근태 관련 단체의 이적행위 관계를 ‘꼭 1면톱으로 쓸 것’, 주모자인 김근태의 출신배경 등 신상에 관한 기사를 꼭 박스기사로 취급할 것”이 충실히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아직도 일부에서 김근태를 재야의 강성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생각한다면 이때의 사건보도들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폭압의 시대에는 싸우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그렇게 행동한 김근태를 보고 과격하다고만 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아무리 지식인의 ‘양비론’이 안전 빵이라지만 문제의 원인제공자는 따로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 정당한 이의를 제기한 측과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항상 똑같이 취급하면 그게 말이 되는가.

‘고문 지옥’ 견뎌낸 ‘초월적 인물’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출판사들이 우리 작가의 작품 중에서 번역출판하길 원하는 첫째 조건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이란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은 삶의 근원적 딜레마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 고문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씨랜드 참사나 수학여행길 교통사고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내 자식이 그 끔찍한 고통 속에 있을 때 나는 편안히 (자고) 있었다”는 생각에, 그 생각이 날 때마다 고통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김근태는 우리에게 부모의 가슴을 불편하고 아리게 하는 자식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편안히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있을 그때 그는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을 위해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민청련의장 김근태 고문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85년 8월24일 서울대 민추위 배후 조종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 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11회에 걸쳐 물고문·전기고문을 당한다. 그로부터 석달 후 김근태는 재판과정에서 지옥의 23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또렷하게 증언한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될 때마다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 복습시켰습니다. 죽음에 대한 협박공갈, 집단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굶기기, 잠 안재우기, 동물적 능욕….”

진저리를 치는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티어 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단폭행을 당한 후 그들은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옥 속에서 김근태는 눈을 가리기 전에 그들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어둠을 통해 날짜를 가늠하면서 고문자의 이름과 인상을 외우려 애를 썼고, 진행과정이 어떠했는지 소상하게 기억하려 했으며, 감옥으로 넘어가서도 반복해서 외워 그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발뒤꿈치 상처부스러기를 모았다. 이 상처조각은 아내 인재근씨에게 전해졌고, 고문을 입증하는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당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다는 그의 고백을 들으면 유대인 출신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떠오른다.

프랭클은 끌려간 사람의 95%를 도착 30분 내에 가스실에서 처형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극심한 기아와 강제노동에 고문까지 견디면서 그는 자기 자신과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의 심리변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 그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 중 99%는 자기경멸로 인한 정신적 황폐화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은 알코올중독이나 약물중독 등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빅터 프랭클은 그야말로 ‘초월적 존재’라 불러도 될 만한 사람이다. 초월적인 존재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박정희같은 사람이 아닌 프랭클, 김근태같은 사람이 바로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극심한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던 시기에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이 딴지를 걸어 아버지는 넘어졌단다. 심하게 다치기도 했었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런 ‘초월적 인간’이기 때문에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면의 쉼없는 일렁거림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 경관에 대해서는 고문 무혐의 결정이 났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김근태는 1988년에야 감옥에서 나온다. 출소후 또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해 정책기획실장을 맡은 김근태는 1990년 5월 또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 3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김근태는 더할 수 없이 ‘징글징글’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심 깊은 강물처럼 외적으론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늘 쉼없는 일렁임이 계속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민주화실현에 벽돌 한 장쯤 쌓는 게 되기는 하는건지, 독재자들의 양심을 조금이라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일인지 회의가 생긴다고 토로하던 사람이 김근태였다.

아내의 생일 무렵에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김근태는 생일선물로 그녀에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인간적 번민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마 인재근씨의 성격을 미루어 보건대 김근태는 이 편지를 보내고 나서 남녀간의 문제로서 뿐만 아니라 사상적 동지로서도 ‘감상적 패배주의’라는 이유로 그녀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런 내적인 일렁임은 오히려 그의 행동이 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나침반 역할을 한 듯하다. 김근태는 히딩크 감독을 좋아한다는 데,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하면서 뛰는’ 축구를 지향하기 때문이란다. 제대로만 소화가 된다면 그보다 더 강력한 전술은 없을 것이다.

1990년 연말 언론인 김종철씨는 두 번째 감옥살이를 하는 김근태에게 편지를 보내 일상에 쫓겨 그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잊다시피 사는 자신의 무심함을 질책하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양심수들을 보며 “그 사람 또 들어갔나? 이제 그만하지 않고…”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라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라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토로한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김근태는 ‘아이들 앞에서 체포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 싫은 인간적 고민’에서 해방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생했지만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이름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은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진짜로 그런 것인가에 대해서 필자는 아직도 의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치부 기자나 지식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지도자’ 선정 조사에서 그가 몇 년째 1위를 차지하는 것은 반갑다. ‘밀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인 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또 민주화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으로 해서 ‘괜찮은 사람이구나’하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한 징표라는 분석 때문이다.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와 대중적 인지도를 일치시키는 일은 정치 전략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므로 필자의 영역 밖이다.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받는 학자 한 분이 장관을 할 때의 일이다. 국회 상임위에서 국회의원들에게 민망할 만큼 추궁을 당하자 그는 속으로 “보통 때같으면 나하고 동석도 못할 사람들이…”하는 생각을 하며 분했다고 말했다. 그 분의 심정을 차용해서 말해보자. 만일 김근태가 ‘정치인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비난을 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정치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평생을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하고 말년에 경제적 사정으로 치료비를 걱정하다 타계한 계훈제 선생처럼, 그렇게 살아야만 진정한 운동가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부당하다. 김근태처럼 미련하게(?) 수많은 사람의 희망을 위해 개인적 삶을 희생한 사람들도 시샘이 날 만큼 성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또 다시 우리 앞에 불행이 닥쳤을 때 용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더 개인적인 이유로 필자는 김근태가 정치인으로 꼭 성공하길 바란다. 김근태 같은 사람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질 거라는 인간적인 걱정 때문이다. 김근태는 그런 ‘희망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끝)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발행일: 2001 년 09 월 01 일 (통권 504 호)
쪽수: 346 ~ 361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