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글/ 정희진
'이승연 누드'사건을 두고 '황당하다', '민족의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식의 비판은 보수적이고 위험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누드'는 식민 역사에 대한 상업주의의 테러 혹은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아니라, 한국의 남성과 여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민족 문제로 보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기 쉽다.
영화 〈원초적 본능〉의 감독 폴 버호벤의 후속작 〈쇼걸〉은, 제목답게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벗었지만 기대와 달리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이 예상치 못한 결과는 성차별 사회에서 포르노, 누드 산업이 생산하는 에로틱한 쾌락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게 해준다. 〈쇼걸〉은 쇼걸들의 벗은 몸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여성의 벗은 몸을 보여주어 남성 관객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고, 쇼걸들의 연대와 자매애를 강조했기 때문에 돈벌이에 성공할 수 없었다.(남성 사회의 관객들은 여성의 단결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승연 누드' 역시 포르노그래피가 쾌락이나 '표현의 자유'의 실천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건이며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포르노를 본 남성 관객 혹은 남성화된 관객이 느끼는 쾌락은 권력 행동의 결과이다.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독자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을 만족시켜 줄 때에 발생한다.
이러한 권력 구조 때문에 포르노 산업은 철저히 성별화된 정치경제학에 의존해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은 포르노를 만들어 돈을 벌거나 구매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승연 누드'는 제작사의 주장대로 '역사적 아픔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화면에서 재현되는 남성과 여성의 성별 권력의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는 누드 산업의 당연한 귀결이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 격차가 최대치일 때, 관객의 쾌락도 최대한 보장될 것이다. 가장 자극적인 소재는 바로 이 권력 관계의 극단화를 의미한다. 일반 포르노 화면에서는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남자 대 여자라는 성별 권력 차이, 그 자체가 주요 쾌락 코드이다.
그러나 '위안부 누드'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남녀라는 성별 권력 차이에다가 남성은 일본, 제국주의, 군인, 성폭력 가해자이고 여성은 한국인, 식민지, 순진하고 겁먹은 '처녀', 피해자라는 코드가 더해져 남성 권력을 극대화시킨다. 나의 문제 제기는 군 위안부 문제가 성적 표현의 금기 성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어떠한 시각에서 재현하느냐이다(군 위안부 할머니가 직접 그린 피해 여성의 누드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므로 '위안부 누드'는 황당한 사건이 아니라, 남성의 이윤과 쾌락을 보장하려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누드의 소재가 위안부였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라면, 일반 누드와 포르노그래피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비판 담론의 목적이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위안부 누드에 대한 시민의 분노와 그로 인한 시장의 외면이 왜 'O양', 'B양' 등 여성 연예인 비디오 피해 사건에는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았을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폭력이 이처럼 성애화될 때, 남성 권력은 보이지 않게 되고 여성 억압은 생물학적 질서로 간주되어 비정치화한다.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인간의 감성과 사랑이 평등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을 에로틱하게 느끼게 되었는가에 대해 묻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등을 에로틱한 것으로 느낀다면, '위안부 누드'는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난받지 않는 일반 누드'와 '비난받은 위안부 누드'는 차이가 없으며, 여성의 인권과 존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포르노그래피 산업의 연속선상에 있다. 만약, '일반누드는 되지만 위안부 누드는 안 된다'는 사고 방식이 그 차이를 발생시켰다면, 이는 문제의 원인을 은폐하려는 남성 사회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누드, 강간 환상 그리고 식민주의의 섹슈얼리티
글/ 서동진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그것의 공식명칭은 종군위안부 테마영상집이었다 한다)로 북새통이다. 식민의 역사를 다시 기억해보자는 진지한 발로에서 위안부 누드를 기획했다는 제작사 측의 주장은, 참으로 가소롭고 기상천외한 설레발이다. 이런 졸렬한 변명을 할 생각이었으면 그냥 함구하고 있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안부 누드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이들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위안부 누드를 만든 이들은 위안부 여성들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을지 모를 은밀한 성적인 환상을 천연덕스럽게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해했거나 무식했던 점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다들 즐기고 있다"는 순진한 사실만을 알고 있었지 "아무도 즐기지 않는 척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어제 나는 친구 누나를 따먹었다"는 식의 흔해빠진 저질스런 음란한 낙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다루고 말았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물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옆집에 사는 친구 누나를 따먹었다는 식의 화장실 낙서와 위안부 여성들의 성적인 재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둘 모두 은밀한 강간 환상의 틀을 통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위안부 여성들이 식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위안부 여성들의 체험을 집요하게 성으로부터 떼어놓으려 애써왔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체험을 상징화하는 유일하게 허용된 방식은 "식민지 백성"이다. 이는 그녀들이 겪은 고통의 핵심적인 원인이 강간이라는 사실을 삭제하는 것이다. 이는 전시에 강간을 당한 여성들의 체험을 인종적 폭력과 식민적인 지배의 결과로 환원하려는 (보스니아나 르완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남성의 역사적 법정의 논리이다. 설령 그녀들이 겪은 강간의 체험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간당한 여성의 분노가 아니라 자기 여자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힘없는 남자들의 무력과 자괴를 위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오랜 세월 숨죽여 살다가 마침내 '커밍아웃'을 하였을 때 그녀들을 그토록 침묵하게 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그녀들이 전시에 강간을 당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누드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대 할머니들을 식민지 백성이 아니라 성적인 대상으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를 기억하는 남성 주체의 입장 안에 강간당한 여성의 자리는 없거나 부정된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이이거나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다. 그렇지만 민족의 역사가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강간당한 여성으로서의 체험을 소외시키고 식민지 백성으로 상징화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부 여성들의 강간의 체험을 완벽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된 채 긍정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위안부 누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억압된 채 즐겨지고 있던 남성적 환상이다. 위안부 누드는 위안부 여성(혹은 성의 희생을 강요당한 역사 속의 여성들)에게 투입되어 있는 은밀한 성적인 환상을 그만 어이없이 누설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위안부 누드는 괜찮다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정반대로 위안부 누드는 강간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인 기억마저 소모하고 있기에 더욱 위악하고 또한 폭력적이다. 위안부 누드는 역사적 기억을 강간 환상의 무대 안에서 소비한다. 그 자리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은밀히 즐기고 있었음에 분명한 성적인 파트너, 마조히스틱한 여성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때의 위안부 여성은 재국주의적 전쟁에 징발당한 채 성적인 보상을 제공해야 했던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집행하는 "나의" 상상적인 여성일 뿐이다. 이는 강간이나 성희롱을 자행한 남자들에게서 흔히 듣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그는 왜 그녀가 그것이 싫었다면 왜 감히 저항하고 부정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놓인 권력관계를 보지 못한 채 오직 욕망의 대면만으로 그 상황을 각색한다. 성폭력과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의 집요한 환상은 언제나 그녀도 분명히 즐겼다는 것이다.
이는 위안부 누드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리고 위안부 누드의 비참함은 바로 이런 성적 환상을 위해 전시 강간이라는 비극적 진실을 망각한다는데 있다. 위안부 누드는 위안부 여성의 체험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우고 있다. 어떻게 감히 "어머니 조국"을 능욕하느냐고 위안부 누드를 비난할 때 그 주장은 식민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식민의 역사 안에 놓인 위안부 여성의 체험에 숨어있는 성을 떼어내고 아울러 자신의 몰역사적인 강간 환상을 유지하려는 몸짓에 가깝다. 위안부 누드는 식민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강간 환상을 이용한 싸구려 포르노일 뿐이다. 그것은 식민적 역사와 전시의 강간을 자신의 환상의 무대 안의 간단한 장치로 소비하려 했을 뿐이다. 따라서 위안부 누드의 평범하고 순진한 의도가 격렬한 거부에 좌절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강간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견지되어야만 하는 "망각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성적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우리는 상대의 욕망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욕망의 무대가 되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현실을 가능한 모른 척해야 한다. 그래야 그 환상은 달콤하고 뜨거워진다. 그러나 위안부 누드는 시퍼렇게 살아있는, 결코 그것을 무덤까지 비밀로 지킨 채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강간당한 여성의 분노와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안부 누드가 실패한 것도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진술하고 증언하는 여성 앞에서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위안부 여성은 결코 자신의 체험을 역사화하지 못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주체가 민족인 한 그것이 기억하는 여성은 어머니나 누이 뿐이다. 민족-역사의 환상과 강간 환상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다. 물론 그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온당한 방식일 수 없고 또한 위안부 여성을 기억하는 올바른 방식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위안부 누드를 비난하는 것은 그것을 은밀히 즐기는 자들의 허울좋은 농담일 뿐이다.
이승연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글/ 영광
<대학내일>에 기고한 칼럼이다.■필자
'위안부' 누드라는 기발한 기획을 들고 나와 '과연 자본의 개척정신에는 성역이 없구나'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으며, '잊혀져 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싶었다'는 가슴뭉클한 말로 기업의 모범적인 공익성 모델까지 제시했던 네띠앙엔터테인먼트는 결국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다.
해방 이후 50년 동안 '위안부'라는 말이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적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더욱이 '위안부' 모델이었던 이승연이 수많은 미디어와 인터넷게시판에서 언어적 사정(射精)을 받아내는 진짜 '위안부'가 되어버렸으니, '위안부' 누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결말은 없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독도, 고구려를 거쳐 이번 '위안부' 누드 파문이 그 화룡정점을 이룰 것으로 보이는 전국민적인 역사상식 테스트의 불길은 그 규모와 위력의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사실 딱 한 단어만 외우면 통과할 수 있는 매우 간단한 시험이다.
힌트? 최근 한 달간 유명 인터넷 언론게시판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를 찾아 쓰면 그게 답이다. 그래도 모르겠다고? 좋아, 그럼 결정적인 힌트. 그 유명한 국민교육헌장의 자랑스러운 첫 문장의 핵심키워드! 아하, 민족! 딩동댕!
그렇다. '민족의 아픔과 상처' 혹은 '민족의 치부(恥部)'를 건드린 이승연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민족적 분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민족'이라는 말이 도대체 누굴 지칭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승연이 '위안부'가 아닌 다른 주제를 컨셉으로 잡았더라면 관음증에 충혈된 눈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다운받아서 그녀와 기획사에게 거액의 돈을 안겨주었을 그 수많은 남성들도 포함되는 것인가?
매일 '더 많은 살색으로 1면 채우기' 경쟁을 벌이고 있는 스포츠신문 기자들이 수요집회에서 카메라를 들고 설칠 때, '민족'적 관점에서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그냥 벗었으면 괜찮았을텐데 정신대, 일본군 성노예라는 역사적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냐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거대한 성산업의 토대를 제공해주고 있는 우리가, 모든 대한민국 군부대 주변에 수많은 '성노예'들이 상주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정신대 할머니들의 편에 서서 이승연을 욕할 수 있단 말인가?
'성노예'의 몸에 쏟아지는 정액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남성의 것이면 괜찮고 더러운 '쪽x리?'의 것이면 안 된다는 것인가?
'이번 이승연 파문은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크나큰 고통임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잖은 진단도 사태를 왜곡하기는 오십보백보다. 역사의 고통이란 말 속의 역사는 민족/국가의 역사이고, 민족/국가의 젠더는 (그것의 계급이 자본인 것처럼) 남성이며, 따라서 그때의 고통이란 더러운 옆집 놈으로부터 딸 혹은 누이를 지켜내지 못한 못난 아버지/오라버니로써의 고통이다. 역사의 고통이란 말 속에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정신대 할머니들의 고통은 없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민족' 혹은 '국민'이라는 말은 항상 '내부와 외부를 구분한 뒤, 외부를 배제하고 그것과 대립함으로써 내부의 차이와 적대를 은폐하기'를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카드빚 때문에 자식들과 함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몸을 던졌던 주부와 수백억씩 차떼기를 하지 않으면 도무지 정치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국회의원들이 경제위기 앞에서 같은 나라의 '국민'이었던 것처럼, 눈과 손과 입으로 일상적인 성폭력을 저지르는 수많은 남성들과 그러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은 '민족의 정조'를 침탈한 쪽x리 앞에서 같은 '민족'이 되는 것이다. 이번 '위안부' 파문을 둘러싼 광풍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소식을 묻어버리고 있는 현실이 내겐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승연은 분명 잘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은 '민족의 치부'를 들춰낸 것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거의 거론되지 않는 논점이지만, 사실 여성의 몸을 이윤의 원천으로 삼는 거대한 성산업을 고려한다면 이승연 본인도 넓은 의미의 피해자라고 봐야 한다).
그 아픔과 상처를 끊임없이 '민족적 치욕'으로 환원하는 이 어이없는 메커니즘이 멈추지 않는 한, 50년 전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 우리들의 주변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는 '위안부'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승연의 누드와 민족주의, 그리고 포르노 '타부'
글/ 깨철이
연예인 이승연씨가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를 찍었다는 일로 전국이 들썩거렸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규탄의 목소리를 내보내고, 누드 사진집을 기획한 기획사와 당사자인 이승연씨의 추락과 망가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나로서는 TV를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너무나 민족적인 '포르노' 한 편을 보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연예인 이승연씨는 본인의 잘잘못을 떠나 한국 남성들의 마초적 민족주의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또 한 명의 '위안부'가 되었다. 매스컴은 육체를 마음껏 짓무르는 쾌감을 전달하려는 듯 성공가도를 달리던 한 연예인의 초라한 몰락을 속속들이 제공하는 어지러울 정도로 현미경적이고, 포르노적인 보도를 통해 억압되어있던 한국 사회의 무의식,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한국 남성들의 억압되고 좌절된 욕망을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통합하는데 성공한 듯 하다. 그래서 여론이라는 합리주의적 시스템은 이 억압되고 좌절된 욕망들이 '저항'이라는 샛길로 빠지지 않고 안전하게 국가와 민족의 품에 안겨 비판의식을 고해성사로 대체하도록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초적 민족주의 포르노에 불과하다고 확언하는 이유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떠들썩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라크 파병과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보여주는 상반된 태도, 기이한 침묵 때문이다. 이승연씨 누드 파동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전쟁'도 '전쟁의 참혹함'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에 이성을 잃고 핏대를 세우지는 않는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오로지 '살'이다. 이승연씨의 잘못은 무엇인가? 그녀의 잘못은 정신대에 끌려간 위안부 여성들과 그리고(이 점을 강조해야겠다) 국가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었던 병사들의 상처, '민족'이나 '국가'라는 언어로 결코 봉합될 수 없는 상처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계산 착오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민족주의를 상업화하는 것에 있어 너무 안이했다는 것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라. 그 영화에서 무엇을 빼고 무엇을 도드라지게 했는지를. 이승연씨의 누드에 대해 민족의 아픔을 상업화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노골적인 상업영화의 관객으로 앉아 눈물을 흘린다.
어렸을 때 '너네 엄마랑 씹해라' 라는 욕을 들으면 눈이 뒤집혀 싸움을 했던 적이 많았다. 바로 그러한 것이 민족적 아이덴티티다. 민족주의는 성(性)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며 따라서 민족 이데올로기에는 '금기'라는 것이 존재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을 보라. 민족은 '어머니'이고, 한강은 민족의 '젖줄'이란다. 민족은 여성의 '살'에 대한 이미지로 구성된다. 루소를 비롯한 낭만주의자 문학파들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공헌한 바는 이러한 성적 친밀성, 교배의 인접성을 통해 민족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는 점일 것이다. 민족은 어머니요, 국가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어머니의 오염, 살의 오염을 두려워하며 수치스러워한다. 그이건 그녀이건 간에 그 수치는 아버지(국가)가 느끼는 수치이다. 그것들은 '성적인 더러움과 역겨운 감정'을 동반한다. 위안부가 못난 아버지 탓이지만 어머니가 수치(민족 역사의 수치요, 국가의 수치가 되는 것)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동요하는 양가적 감정에 민족주의가 놓이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너네 엄마는 화냥년이다, 너네 엄마랑 씹 해라! 마초적 남성은 이 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엄마를 정화할 책임감을 부여받는다. 엄마에게 몸을 씻으라고 욕실에 가두고, 저들의 엄마를 능욕하는 복수를 꿈꾼다(인터넷 포르노 사이트 중에는 예전부터 '왜년의 보지에 태극기를 꽂자!'는 사이트가 있어 왔다). 이것이 요즘 내가 TV에서 본 포르노 '타부'다. 그런데 이 '타부'는 80년대에 여관방에서 뒹굴며 본 포르노 '타부'시리즈의 정치성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사회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희망이 결정적으로 멀어진다면) 원한이 인종의 불평등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는 안 된다. 사회적인 것의 실패는 인종적인 것의 성공을 이룬다." - 쟝 보드리야르 -
페미니즘은 내셔널리즘을 초월할 수 있을까?
글/ 우에노 치즈코
우에노 치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이선이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9)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1995년 북경 여성 회의에서 재일 한국인 여성인 김부자 등과 나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워크숍을 조직했다. 그 곳에서 나는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간에 국익을 거래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한일 양국 페미니즘은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그에 대해 굉장히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김부자의 문장에서 인용해 보자.
(우에노의 연설에서 이야기된) 페미니즘은 내셔널리즘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둘러싸고...회의장에 있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인 한국계 미국인은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우리 국경은 당신 나라 군대에 의해 침략당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국경을 잊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내셔널리즘과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구미 페미니즘이 갖고 있는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사고 방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 내셔널리즘은 아시아 페미니즘에 중대한 문제이다.
여기서 김부자의 논점은 일본인 페미니스트가 침략당한 나라 여성들을 포함한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국경을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 및 일본인의 가해성을 무마시켜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다. 이 책(<내셔날리즘과 젠더>)의 제1부에서 내가 논해 온 것처럼 일본 페미니즘에는 국경을 초월했던 역사는 없다. 그것은 페미니즘이 논리 필연적으로 국가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내가 제기한 물음, 그리고 답을 추구해 온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논해 온 것은 '2류, 3류 국민'까지 동원하고자 한 '국민화'의 함정과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의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젠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과 '그것이 운명이다'고 하는 것은 다르다.
만약 페미니즘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페미니즘은 근대의 사정 거리를 넘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근대와 운명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국민 국가론 용어로 말하면 페미니즘은 국민 국가의 틀 안에서 형성되어 기껏해야 국민 국가 안에서 젠더와 관계없는 '분배평등'을 요구하는 사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일국 페미니즘!). 근대 페미니즘을 회고적으로 논하는 논조 속에는 근대 페미니즘을 사전에 시민 사회적인 부르주아 페미니즘으로 축소시킨 다음 그 역사적 한계를 지적하는 식의 '눈 가리고 아웅하기'에 가까운 것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증명하고자 한 것은 근대 페미니즘의 역설, 즉 페미니즘이 근대의 배리 자체이며, 따라서 근대를 물어 찢는 것 외에 활로를 찾아낼 수 없다고 하는 필연이었다.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한 적이 없었다는 역사에 근거해 페미니즘은 국가를 초월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자의 국적하에 분단되어 버린다. 더 이상 누구도 "자매 연대의 전지구화 sisterhood is global"라는 낙천적 보편주의 입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젠더라는 변수를 역사로 들고 온 것은 그 아래에서 계급, 인종, 민족, 국적의 차이를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차이-게다가 너무도 자연화되어 있기 때문에 차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차이, 말하자면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차이-를 덧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하에서는 젠더말고도 인종이나 계급이라는 변수가 덧붙여졌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인종이나 계급이라는 변수가 젠더라는 변수를 은폐해 온 것을 페미니즘은 고발해 왔을 것이다. 인종이나 계급이라는 변수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젠더 변수를 계기로 더욱 복합적인 카테고리로서 '재발견'된 것이다.
페미니즘의 목적은 어떤 배타적인 카테고리를 다른 배타적인 카테고리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라는 본질주의적인 공동성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처럼 '나'는 '국민'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한 카테고리의 상대화야말로 페미니즘이 의도하는 바이다.
국민이라는 집단적인 정체성의 배타성을 초월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 불러낸 것이 '세계 시민'이나 '개인' 또는 '인간'이라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다. 모든 국적을 초월한 코스모폴리탄, 보편적인 세계 시민이라는 개념 또한 위험한 유혹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모든 귀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해 마치 역사에서 부담해야 할 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한다.
'국민'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젠더나 국적, 직업, 인종, 문화, 에스니시티 등 각양 각색으로 존재하는 관계성의 집합이다. '나'는 그 어는 것도 피할 수 없지만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내'가 거절하는 것은 단일 카테고리의 특권화나 본질화이다. 그러한 '고유의 나'-결코 보편성으로 환원된 '개인'이 아닌-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대표=대변'의 논리이다.
페미니즘이 국경을 초월하는 방식에는 분명 김부자가 염려하는 것과 같은 '제국 페미니즘'이라는 보편주의의 강요도 있을지 모른다.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경계해야 할 가치가 있지만, 페미니즘은 국경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 역시 진실이다. 페미니즘은 국경을 초월해야 하며 또한 그럴 필요가 있다.
'위안부' 소송에서 개인 보상 논리가 그러한 '국경을 초월하는'의미를 갖고 있다. '전후 보상은 양국간 조약으로 보상이 끝났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항의해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나'의 이해가 국가에 의해서 대변되지 않으며, '나'의 신체가 권리가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안부'의 싸움, 즉 '나'의 존엄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도 권리의 '대표=대변'을 거부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만약 국가가 '나'를 범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자격도 있다. '나'의 책임이란 그 국가에 대한 대치와 상대화 속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국민으로서' 책임을 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의 신체와 권리는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 여성은-그리고 남성도-말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가 여성의 '인권 침해'라는 언설로 구성된다고 한다면 '병사'로서 국가를 위해 살인자가 된 것 또한 남성의 '인권 침해'라고 입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인권론은 거기까지 사정 범위를 갖고 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들이민 물음은 단지 전쟁 범죄가 아니다. 전쟁이 범죄인 것이다.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사상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여성'이라는 위치는 '여성 국민'이라는 배리를 나타냄으로써 국민 국가의 균열을 노골화했지만, 그를 위해 '여성=평화주의자'라는 본질주의적인 전제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국민 국가'도 '여성'도 함께 탈자연화, 탈본질화하는 것. 그것이 국민 국가를 젠더화한 다음 그것을 탈구축하는 젠더사의 도달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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