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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독도는 갈매기의 땅

by eunic 2005. 6. 29.
독도는 갈매기의 땅
[한겨레 2005-06-26 18:33]
[한겨레] 지난주 6박7일 동안 서울에서 성황리에 치러진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의 주제는, ‘경계를 넘어서(Embracing the Earth)’였다. 인종, 국가, 지역 간 갈등과 대립을 여성의 시각에서 극복하자는 것이다. 대회에 참가한 여성들은 현재의 세계를 ‘문명 충돌’이 아니라, 폭력을 원하는 세력과 평화와 보살핌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여성들 간의 투쟁의 시대라고 정의하였다. 사실, 기존의 국가 간 갈등은, 정확히 말하면 남성들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이제 남성의 시각으로는 빈부 격차, 환경 파괴, 폭력, 인종 증오, 근본주의와 같은 인류가 직면한 고통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예는 독도 문제일 것이다.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독도 ‘침략’에 분개했지만, 동시에, 독도 논란의 최대 수혜자는 이 국가 대립 구도에서 중요한 국내 문제를 희석시킨 노무현, 고이즈미 정권이 될까 우려했다.

나는 “독도는 일본 땅” 주장에 “한국 땅”이라고 대응하는 것이, 바로 일본 우익이 의도한 바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의 목적은 독도를 소유하는 것이라기보다, 독도를 매개로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이곳을 분쟁 지역화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독도에 군대를 파견하자는 민주노동당의 성명서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달콤한 화답’이었다. 이와 반대로, “독도는 일본 땅도 한국 땅도 아닌 갈매기가 사는 곳”이라는 변홍철 〈녹색평론〉 편집장의 지적은, 이 문제가 남성(사람) 중심의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가장 현실적인 혜안을 담고 있다.

국민의 범주에서 제외되었다는 의미에서, 여성은 갈매기와 비슷한 정치적 위상을 갖는다. 여성에게 국가가 없다는 말은 국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 내부의 사회적 약자들은 국민 외에도 여성, 노동자 등 다중적 정체성을 체현하고 있다는 의미다. 2500여 편의 논문이 제출된 이번 대회에서, 나는 ‘지구화와 기지촌 성매매’를 주제로 발표했다. 내가 한국 남성들의 이주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폭력과 성매매에 대해 설명하자, 어떤 한국 여성이 “여기 외국 여성도 많은데, 왜 창피하게 한국 남성을 나쁘게 말하나, 이는 국가 망신”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나는 달리 묻고 싶다. 우리 내부의 성별과 지역, 계급 차별을 은폐하는 ‘한국인’이라는 통합적 정체성이, 지구화되면서도 지역화되고 있는 이 ‘글로컬라이제이션’ 시대에 과연 현실적인 사고방식일까? 국민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최종 심급의 정체성일 필요가 있을까? 이미 자본과 전쟁 세력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이동하고 연대한다. 왜 약자들이 더 국가의 이름에 목을 매는가? 일제하 ‘군 위안부’ 역사가 민족 모순으로 간주되어 한-일 간 갈등일 때는 해결되지 못하다가, 국가를 초월한 여성들의 ‘자매애’로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권침해로 인정받았듯이, ‘국민’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 공동체들의 연대에 의해 출구를 찾고 있다. 이미, 현실은 모든 모순을 국가 경계로 환원하는 시각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한국보다 잘사는 일본에서의 〈겨울연가〉 열풍은, 일본 여성들이 자신을 ‘일본인’보다는 ‘여성’으로 정체화하기 때문이다. 〈겨울연가〉에 빠져 있는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국가는 일본이나 한국이 아니라 ‘욘사마 나라’이다.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은, 그들이 필리핀인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고통이다. 이런 이슈들의 분석과 대안 모색은 국적보다는 여성 정체성에 주목할 때 가능하다.

정희진/ 서강대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