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 소녀의 고통 | ||
[한겨레 2005-05-11 21:12] | ||
문제는 언어 없음이 아니라 세상은 언제나 잘 굴러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심리, 고상한 삶에 대한 추구에 있다. 현재 상영 중인 쿠르드 출신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거북이도 난다>는 전쟁의 고통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를 포함하여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쿨’하고픈 관객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상처’를 준다. 신윤동욱에 의하면, 이라크, 터키, 시리아 등지에 나라 없이 흩어져 살아가는 쿠르드인은 약 4천만명. 세계 최대의 유랑 민족이다. 이들은 이라크에서 학살당하고, 미국에 배반당하고, 터키에서 억압당하는 신세다. 1988년 후세인은 생화학무기로 쿠르드인 5천명을 몰살했다. 당시 인종 청소로 희생된 쿠르드인은 18만명이 넘고, 80만명의 난민이 생겼다. 영화에서, 현실에서, 쿠르드 아이들은 팔과 다리를 잃은 채 물을 찾아 지뢰밭을 헤맨다. 열 살도 안돼 보이는 어린 소녀는 부모를 죽인 이라크군에게 강간당하여 아이를 출산한다. 이들에게 ‘모성’이나 ‘어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너무나 끔찍해서 언어의 대상으로 삼기는커녕, 무의식에서조차 떠올리기 싫은 전시 강간은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붕괴시킨다. 전쟁 후에도 성폭력은 계속된다. 어느 사회나 전시뿐만 아니라 ‘평화시’에도, 성폭력의 고통을 인간 삶의 일부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쿠르드 소녀의 고통처럼 전쟁은 성별적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 명예의 저장소이자 영토, 혈통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남성 집단간 전쟁터가 된다. 여성의 신체 기관이 공간의 명칭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들이 사는 곳인 ‘자궁(子宮)’, 영어의 버자이너(vagina)는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칼이 머무는 ‘칼집’을 의미한다. 질의 한자(膣) 역시, 방(室)이라는 글자를 포함한다. 남성 문화는 ‘자기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다른 남성 집단의 여성 몸을 침범(강간, 납치)함으로써 남성성을 경쟁한다. 이러한 의미 체계로 인해, 근대전의 특징인 절멸 전쟁에서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과 강제 임신은 ‘인종 정화’로 합리화된다.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1995년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가한 인권 단체들은, 제네바 헌장이 강간을 ‘명예를 침해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음을 비판한 바 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성폭력을 인간에 대한 고문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남성 공동체의 명예 훼손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강간당한 여성은 그녀가 속한 남성 공동체가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피해를 숨기고 침묵해왔다. 침묵당함은 또 다른 폭력이다. 상처를 숨기는 대신, ‘거북이도 난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간헐적’ 폭력이라면, 전쟁과 평화의 분리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폭력이다. 영화는 피 흘리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절박하게. 일상적 폭력을 평화라고 믿는 침묵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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