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의 정치경제학 | ||
[한겨레 2005-06-05 18:33] | ||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음, 그만큼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있다는 거지”라고 둘러댔다. 엥겔스의 고전적 논의대로, 일부일처제 가족의 주요 기능이 계급의 재생산이므로 가족이 붕괴되면 자본주의도 유지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에서 여관업이 번창하는 실제 이유는, 가정이 사랑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과 늦은 성년과 관련 있는 것 같다(자녀들이 나이 들어서도 부모랑 같이 살기 때문에, 자식도 부모도 마땅히 성생활을 할 ‘룸’이 없다). 최근 전국의 기혼 여성 1000명을 조사한 결과, 한 달에 섹스 횟수가 한 번 이하인 ‘섹스 리스’ 부부가 30%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오랜 ‘여관 생활’에 지친 연인들이 결혼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합법적인 성생활을 위해서인데, 정치학자 전인권의 표현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은 ‘무성적 지대(DSZ, de-sexualized zone)’다. 한국인들은 ‘집’보다 ‘길 위의 섹스’를 즐기는 것 같다. 가정은 규범적으로는 가장 당당한 성적 공동체로 간주되지만, 성 활동이 그리 활발한 곳이 아니다. 하기야, 즐거움을 누린다는 의미의 ‘향락’이 반드시 집에서만 일어나야 할 이유도 없다. 원래 근대 가족 제도에서 ‘집’은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 ‘아니다’. 사생아의 영어 단어는 ‘러브 차일드’인데, 사회학자 조은의 지적대로, 뒤집어 말하면 가족 제도에서 출생하는 아이는 사랑의 산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가족과 사회가 배타적인 공간으로 설정되고 가족이 친밀성을 독점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분리되었다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여관은 공·사 영역 분리를 통합하는, ‘집 밖의 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서구에서 혼외의 사랑은 대체로 이혼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외도’는 가족에 역기능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외도’는 ‘가정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집 밖 사랑은, ‘자본주의 유지에 봉사하는’ 가족 제도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인’ 가족 이기주의에 별로 저항적이지 않다. 오히려 순기능적이다. 사람들은 ‘외도’의 즐거움으로 가족 제도의 고통과 지루함을 견딘다. 한국 남성들의 혼외의 성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성매매의 성격이 강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한국은 강력한 가족주의 사회지만, 당위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강요하고 신화화할 뿐이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은 친밀성과 자발적인 상호 보살핌의 공간이 아니라 지나치게 도구적이다. ‘기러기 아빠’는 이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이는 남성이 희생하는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족이 자녀 교육의 성공, 즉, 출세 지상주의와 경쟁 논리로 가득 찬 공적 영역에 얼마나 종속적인가를 보여준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이혼율 3위다. 준이혼 상태의 부부까지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거의 수위에 다다를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결혼이 법적, 인신적 상호 예속이라는 보험료를 내는, 외로움에 대한 장기 보장성 보험이 아니라는 걸 안다. 성과 사랑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식과 실천은 가족의 틀을 ‘뛰어넘고 있다’. 연애가 대중화, 민주화된 지 오래고, 성은 자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연애에 대한 열망과 다양성에 비해 이를 수렴할 제도는 탄력적이지 못하고, 사회적 고민과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다. 변화하는 사람들의 몸과 감정을 제도에 맞출 것이 아니라, 기존 가족 제도 권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산, 재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희진/ 서강대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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