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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요즘 소설이 다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섹스''

by eunic 2005. 4. 18.
"요즘 소설이 다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섹스"
佛 원로작가 로제 그르니에, 예술원서 강연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2004-10-12

"오늘날 많은 소설이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 정사를 벌이느냐를 이야기한다고 말해야 옳다"


대한민국예술원(원장 이준)이 개원 5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국제심포지엄에서 프랑스의 원로작가 로제 그르니에(85)는 12일 '오늘의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으로 문학의 현주소와 미래에 대해 강연했다.


그르니에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지 못한 채 읽히고 있다"고 했던 철학자 겸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 소설, 연극의 주된 주제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17세기 라파이에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에서 작가는 범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것의 증인되기를 그쳤다. 작가가 하나의 '불행한 의식'으로 변하면서 소설의 기술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며 "이 작품에서 클레브 공작부인과 느무르 공작 사이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이후 스탕달 등 여러 작가에 게 영향을 끼쳤다"고 소개했다.


이어 "18세기에 이르면 소설들은 '사랑'이 아니라 '쾌락'을 이야기하면서 그 시 대의 물질주의적 철학과 맞물리게 된다"며 "장-자크 루소의 '신 엘로이즈'에 이르면 결핍과 고통을 다루게 되는데, 그는 죄많은 사랑을 승화시켜 소설의 교육적이고 도 덕적인 측면과 조화를 꾀했다"고 프랑스 소설의 변천과정을 설명했다.
그르니에는 19세기 문학이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로 옮겨온 과정을 이야 기한 뒤 "몇 년 전부터 소설이 어디로 가게 되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 다고 '소설 위기론'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요즘 작가들이 다루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섹스"라면서 "정사장면에 대한 묘사는 남성작가보다 여성작가들이 더 대담하고 적극적인데, 그들이 라파이에 트 부인처럼 사랑은 위험한 감정이므로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르니에는 문학을 난관에 빠뜨린 요인으로 과도한 상업주의와 매스미디어를 들 기도 했다.
그는 "문학과 별로 상관없는 작품들과 작가들을 과도한 경제, 마케팅, 미디어의 구조로 편입시켜 요란하게 광고를 해댄다"면서 "이런 상업적 성공은 문학적 야심을 표방하는 작가들, 서점의 진열장에서 조그만 한쪽 자리를 얻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작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요즘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자가 픽션'(작가가 실화인 것처럼 믿게 하려 고 애쓰는 소설)은 기자들이 많이 쓰는데 과거에는 '기자가 쓴 소설'은 칭찬이 아니 었지만 요즘은 기자가 쓰면 혜택을 입는다"면서 "언론,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일하 는 그의 친구들이 열심히 달려들어 이른바 '칭찬 품앗이'를 해준다"고 비꼬았다.


그르니에는 "나는 사르트르, 카뮈 주변에서 형성된 실존주의 세대에 속한다"고 소개하면서 "이같은 사실은 내가 여러 가지 유행, 운동, 유파들의 변천 광경을 목도 했다는 것을 뜻하지만 문학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별로 아 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이 질문에 대해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재능있는 여성 소설가라고 지목한 실비 제르맹의 말을 인용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공간 속으로 끝없이 탐험해 들어가는 일이다. 길을 뚫 고 이미지를 심는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어떤 일을 추구해 나간다. 앞으로 나아가지만 지평선을 향해 걸어갈 때처럼 항상 미완성 상태일 뿐이다. 가면 갈수록 지평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이어 그는 "글쓰기는 어떤 종류의 음악과도 같아 때로는 (출판사 편집자로서) 원고의 반페이지만 읽어도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서 " 그같은 감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다. 그 책들의 페이지들에서 우리 는 '어떤 조국'과 피난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작가 들의 조국이다"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캉 출신인 그르니에는 카뮈가 주도했던 '콩바'지와 '프랑스 수아르'지를 거쳐 20년 넘게 신문기자로 일했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자로 오랫동안 일해왔으 며, '시네로망' '겨울 궁전' '물거울' 등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집, 2년 전 국내에 번 역된 산문집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소설로 페미나상, 카트르 쥐리상, 아카데미 프랑세즈 단편소설 대상 등을 받았 고, 에세이로 알베르 카뮈상, 11월상, 조제프 델테유상, 3천만 애독자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대상을 받는 등 프랑스 문단의 거장으로 대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