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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을 센다

기억의 채널

by eunic 2005. 3. 3.
기억의 채널

오래된 수첩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그것은 숫자이기 전에 먼 기억의 채널, 또 하나의 번지수였다

서로의 말과 말의 의미를 연결해주는 통로였다

묻혀 있던 채널을 서둘러 눌러본다

일련의 숫자들을 통하여 그리움이 짜르르, 짜릿하게 울린다

내 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밀려온다

갑자기 낯 모를 소음이 앞을 가로막는다

거칠게 밀려나오던 생각들이 생경한 벽에 부딪혀

싸늘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목구멍에 모여 말을 기다리던 온갖 감정들이 혼선된다

숨을 삼킨다.주인이 바꾼 숫자 앞에서

나는 어떠한 인기척도 내지 않는다

회로가 차단된다. 경고음이 뚜뚜 울린다

말과 호흡의 통로였던 가느다란 전화선

이름을 말해주지 않아도 언제나 정확히 기억해내곤 했었다

한때 감정의 떨림까지 울려주던 회로의 파장은

나를 망각했다. 이제 그는

어느 채널을 열어 누구와 가슴속 전파의 파장을 울리고 있나

미세한 회로는 어떤 감정의 떨림에 길들여지고 있나

천천히 주인 없는 채널을 지운다

이 순간에도 어떤 번지수는 주인을 바꿀 것이다

잠든 사이 소리없이, 나의 소통하던 그 일련의 번호들 전부

어디론가 실종되어버릴지 모른다

나는 수첩에 남아 있는 모든 기억의 채널을 더듬어

하나씩, 그러나 조급하게 숫자를 누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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