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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사랑의 기념비적인 사건과 일상

by eunic 2005. 3. 2.

<평론>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각 - "봄날은 간다"

동아신춘영화평론가작

사랑 혹은 시간의 담론 - ‘봄날은 간다’
- 이 재 현

1.

허진호의 영화〈봄날은 간다〉는 사랑에 관한 담론, 그 중에서도 사랑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담론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상처와 치유'에 관한 지점으로 약간만 시선을 돌리면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담론이 된다.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치유는 곧 기억과 망각에 다름 아니고 영화는 끊임없이 기억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진호의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사랑이 시간으로, 시간이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랑과 시간의 이동은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끊임없이 스며드는 삼투압 현상과 같은 것이고 영화는 단지 외형적으로만 시간을 덮어 쓴 사랑의 담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사랑이 드러나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하고, 시간이 감지되지 않고서는 사랑이 드러날 수 없다. 때문에 허진호는 독특한 방식―시간으로 쓴 사랑이야기 혹은 사랑으로 쓴 시간이야기―으로 사랑과 동시에 시간을 성찰한다. 하지만 사랑과 동시에 시간을 성찰하는 무수한 담론이 존재하는 가운데 그의 담론이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성찰이 영화라는 장르에 고유한 미학적 형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봄날은 간다〉는 단순히 영상미라고 불리어지는 서정성의 차원에서 잘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이후로 밝혀지겠지만〈봄날은 간다〉는 영화라는 매체만이 포착/창출해 낼 수 있는 고유한 이미지를 통해서 사랑과 시간의 담론을 만들어 낸다.


2.

살갗이 벗겨진 corch: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롤랑 바르뜨,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 여자 주인공 은수가 읇조리는 노래 가사가 대변하듯이 영화〈봄날은 간다〉는 내러티브면에서 젊은 연인의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그러나〈봄날은 간다〉에는 관객들이 일반적으로 멜로 영화에서 기대하는 '영화적인 재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랑의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엮는데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극적인 만남도, 자극적인 사랑의 순간도 없다. 게다가 이별의 과정에서는 '친절한 설명'도 빠져 있다. 이처럼 영화는 관객의 기대지평에서 한 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리고 너스레를 떨 듯이 사랑의 순간에 라면을 끓여 주고, 연인의 등을 긁어주고, 운전을 가르쳐 주고, 이별의 순간에 창가에 앉아 트로트를 부르고, 연인의 차를 긁는다. 사랑의 의미들이 실려있지 않을 것 같은 소소(小小)한 순간들의 연속.
〈봄날은 간다〉는 이처럼 일상에 던져진 사랑의 모습을 관찰한다. 영화는 사랑의 기념비적인 사건들 보다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에 충실하며 사랑이란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들 사이의 순간들 ― 과정이며 지속이라고 말한다.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대다수의 사랑에 관한 담론이 사랑에서 시작(만남)과 끝(헤어짐)의 우연성과 비극성만을 부각시키면서 사랑에 대한 허위 의식(?)을 독자 혹은 관객에서 심어준다면〈봄날은 간다〉는 사랑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것은 수많은 순간들 중의 하나 ― 그것도 매우 예외적인 순간인 것임을, 사랑의 본질이란 시작과 끝 사이의 무수히 작은 순간들의 지속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영화〈봄날은 간다〉는 이러한 일상적인 순간들의 지속에서 사랑의 언어, 혹은 상실의 언어를 읽어 낸다.
그런데〈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상실의 언어는 음성으로 실현되기 이전의 언어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그 안에 사랑이 존재하듯이, 사랑은 명명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복잡한 감정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영화〈봄날은 간다〉는 일상의 힘을 빌어 이러한 감정들 전체를 담아내려고 한다. 무수한 사랑의 담론을 통해서 형식화되고 각질화된 사랑에서 껍데기를 제거한 후의 무정형의, '날 것'으로서의 사랑, 일상이라는 혼합물 속에 섞여 있는 사랑이라는 그 '모호한 욕망'의 덩어리를 통째로 관객에게 선사한다.
영화 속에서 은수와 상우의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닌, 상우가 은수에게 라면을 끓여주고, 택시를 타고 서울에서 강릉까지 달려가고, 늦은 밤 누워서 히죽히죽 웃는 곳에 있다. 그리고 이별은 은수가 짐을 싸놓고 홀로 웅크리고 있고, 창가에 앉아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그 곳에 있다. 영화는 거기 그렇게 오래 전부터 사랑이 끓고 있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