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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과거는 언제 현재로 귀환하는가?

by eunic 2005. 3. 2.

5.

영화〈봄날은 간다〉는 과거 지향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상우가 사는 오래된 한옥에서 보여지는 명백한 퇴락의 이미지와 은수가 사는 강릉 변두리의 아파트 단지가 보여주는 '촌스러움'-촌스러움은 곧 과거의 흔적이 아직 벗겨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은 영화의 공간을 추억으로 채색한다. 또한 상우와 은수가 함께하는 '자연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은 잊혀져 가는 소리를 찾아내서 틀어주면서 과거에 묻힐 뻔한 소리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상우와 상우의 아버지는 '뽕짝'-흘러간 노래에 능숙하다. 이처럼 영화의 곳곳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요소들이 꼼지락대며 관객을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에 젖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화의 과거 지향적인 면은 인물들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상우의 직업은 자연의 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지만 그것은 곧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다. 롱 테이크로 촬영된 영화 속의 녹음 장면들에서 보여지는 지극히 정적인 순간들은 상우의 녹음 테이프에 감기는 것이 소리인 동시에 시간임을 암시한다. 재생된 녹음 테이프에서 들리는 것은 대밭의 '쏴-'하는 바람 소리인 동시에 녹음 테이프에 진공 포장된, 그 때 그 시간인 것이다. 이는 상우가 산사에서 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녹음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는 진정 눈 떨어지는 소리를 기록하려던 것인가? 은수와 함께 하는 그 밤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상우라는 인물은 직업적으로 시간을 잡아내는 동시에 태연스럽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과거 혹은 현재의 영속성에 대한 희구를 품고 있다. 그리고 상우의 할머니가 있다. 젊은 시절 사별한 남편을 잊지 못하고 가족들의 방심을 틈타 쉴새없이 기차역으로 달려가는 할머니에게 집에서 기차역까지의 길은 단순한 보도가 아닌 과거로 열려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끝에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가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기차역으로 총총 사라지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는 상우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거라는 시간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주술사들의 뒷모습을 보게된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는 존재들과 사물들로 인해 영화 속에서 시간은 자꾸만 앞으로 흐르지만 영화적인 공간은 과거를 향하게 된다. 결국 영화는 과거의 축적된 시간들이 현재를 미래로 밀어내고 있는 형국이다. 이처럼 영화〈봄날은 간다〉의 시간은 완연히 과거 지향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6.

지속은 전진하면서 팽창하고 미래를 파먹는 과거의 연속적 진보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순간부터 한없이 그 과거는 스스로 보존되고 있다.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中)
그러나 베르그송의 관점에 따르면 시간의 본질은 지속이고 지속은 곧 기억이다. 현재는 끊임없이 매순간 과거와 미래로 갈라지는데 과거로 나아가는 것이 추억이라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지각이다. 하지만 지각의 순간은 다시 근접 과거로 변하게 되면서 시간은 끊임없이 과거화되면서 쌓여가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영화〈봄날은 간다〉에서 접하게 되는 시간은 과거 지향적인 시간이 아닌 시간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적 공간이 밀리듯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영화가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 속 과거의 이미지와 시간의 문제는 할머니의 존재를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시간이 지속이며 기억이라면, 기억을 위해선 신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 신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기억이 된다. 베르그송의 저서〈물질과 기억〉의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물질은, 존재는 곧 기억인 것이다. 따라서 실체는 지속이며 기억이고, 존재는 기억에 의해 끊임없이 팽창한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의 존재는 즉각적으로 기억으로 환원된다. 치매에 걸린 그녀는 자신의 늙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치매에 수반되는 기억 상실이 그녀에게서 일정 순간의 과거를 삭제시킨 것이다. 이에 할머니는 자신의 젊은 시절에서 고정된 채, 젊은 시절의 자신만을 기억하고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이다. 곧 그녀의 잘려진 기억은 그녀를 젊은 시절로 되돌린 것이다. 기억(삭제된 과거)은 곧 물질(젊은 시절로 돌아간 할머니)인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할머니는 늙지 않고 기억의 마지막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과거는 현재와 절연된 채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기억)가 지속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화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역으로 달려가고 상우가 녹음을 하는 것은 과거의 순간을 현재에서 소생시키려는 의지이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의지적인 노력과 함께 끊임없이 현재를 움직이는 작동 기제로서 과거도 존재한다. 은수는 손가락이 베었을 때 무심코 머리위로 손을 들고 흔든다. 그리고 상우를 만난다. 기억의 힘으로 은수는 상우를 기억해 내고, 그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 되찾아 지듯이 과거는 현재의 어떤 순간들에 응답하며 현재로 귀환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현재화의 과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을 담아 낼 수 있는 것이다.

7.

그러나 단지 과거의 지속적인 현재화로서 시간의 흐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이지만 여기서 기억의 재생산이 없다면 시간은 과거의 시점에서 중단될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현재라는 시점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현재는 과거가 귀환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시간이 현재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면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화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의 두 방향으로 갈려지면서 나타나고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즉 현재는 지각되는 순간 나타나고(present) 지나간다(passed). 이로 인해 영화는 무언가가 계속 통과하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과거의 시간의 현재로 귀환하는 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면, 현재의 계속적인 갈라짐은 영화의 내적인 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흡이 긴 롱테이크와 미디엄 샷, 롱 샷으로 구성된 장면들은 피사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재라는 순간이 나타나고 지나가는 순간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재는 끊임없이 갈라지기 때문에 카메라는 쉽게 다른 샷으로 넘어갈 수 없다. 즉, 영화는 가령 행위의 극적인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 시간을 자르고 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생성되기 위해 의미가 다가오는 순간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상우가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강릉으로 달려와 은수의 집 앞 도로에서 멈출 때, 카메라는 둘을 반응샷으로 찍지 않고 멀치 감치 떨어져서 둘을 잡아낸다. 둘이 서로를 알아보기 이전부터 카메라는 그들을 응시하면서 그들이 알아보는 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가 호흡을 놓쳐 어정쩡하게 되어버린 씬들이 몇 개 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현재는, 사랑은 지속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이처럼 일상이라는 무수한 의미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순간들 ―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자신들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생성되는 시간 속에서 사랑을 관객과 공유한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사랑의 언어가 아닌 언어 이전의 그들이 경험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총체이며 사랑 이전에 그들이 겪음직 했던 삶의 부단함과 충만함일 것이다.

(주)
1.여기서 반 박자 쯤 느리게 연출되었다는 것은 고속 촬영으로 이러한 장면들이 촬영되었다는 것이 아닌 영화의 내적인 시간에서 봤을 때 이러한 씬들이 다른 씬들 보다 심리적으로 느린 호흡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2.가령, 아침과 점심 사이의 '일상'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또한 매순간 변덕이 죽 끊는 듯한 '일상'의 감정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설명할 수 있는가?

3.가령, 내가 넘어지면서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가정했을 때, 이미 넘어진다고 지각하는 순간 나는 넘어진 것이며 넘어진 순간의 아픔이 지나간 감각으로서 지속되어 남아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