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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시간의 비균질성으로 사랑을 뽑아내다

by eunic 2005. 3. 2.

[평론] 영화를 보는 다른 시각 - "봄날은 간다"

사랑 혹은 시간의 담론 - ‘봄날은 간다’
- 이 재 현




3.

그러나〈봄날은 간다〉는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들에 사랑이 녹아 있다는 전제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일상적인 순간들이 사랑의 언어로 비등하는 순간들을 잡아낸다. 허진호의 재능이자 영화〈봄날은 간다〉의 특별함은 일상이라는 혼합물 속에서 숨겨져 있는 사랑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내밀한 순간들―사랑의 '에쎈스'를 뽑아내고 정제하는데서 발휘된다. 무성 영화에 가까운, 상우와 은수의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계속되는 소리 녹음 장면들은 일상적인 몸짓이 얼마나 정밀(情密)한 사랑의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며, 상우가 은수와 헤어진 후, 쭈그리고 앉아 흔들리는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정적인 장면은 상실의 슬픔, 두려움이 눈물이나 울음보다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에쎈스'의 추출은 시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롱 테이크로 촬영된 이러한 장면들은 '반 박자'쯤 느리게 연출(주1)되었는데 그로 인해 드러내는 것은 시간이다. '반 박자'의 차이로 발생하는 시간의 느린 흐름은 일상적인 순간이 사랑과 상실의 감정들로 전환되면서 발생하게 되는 시간의 물리적인 변화―사랑의 닮고 달은 상투어, '그때는 시간이 멈춘 듯 했지'라는 사랑에 빠진 이들이 겪게 되는 시간의 '진공'상태―를 성공적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영화〈봄날은 간다〉는 주인공들의 감정이 농밀해지는 순간에 시간의 객관적인 흐름을 거부하면서 시간의 비균질적이며 주관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봄날은 간다〉는 지극히 '영화적인' 사랑에 관한 담론―영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쟁은 발레리가 소설을 폄하하면서 예를 든 유명한 어구-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차를 마셨다-를 인용하면서 소설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기록적인 측면이 소설의 창작 가능성을 제한한다면 영화작가는 소설가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위치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화 작가는 후작 부인을 직접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현의 직접성은 결국 영화는 영화의 최소 단위인 하나의 샷에서조차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그렇지만 영화의 본질은 재현의 직접성에 있는 것이 아닌 재현의 연속성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화에 있어 재현의 연속성은 어느 시점에서 소설의 기록성을 넘어서 시의 추상성/상징성에 다가선다. 들뢰즈가 현대 영화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이미지(image-temps)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설명하듯이 영화의 질적 변화는 영화사 초창기 영화의 유기적인 전체(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계량화된 시간이 운동에 종속된 상황, 즉 운동-이미지(image-mouvement)를 탈피하고 역으로 운동이 시간에 종속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여기서 운동이 시간에 종속된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영화가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즉, 운동들을 엮기 위해서 시간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시간의 드러냄을 통해서 운동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드러냄'의 과정에 시간―주관적이며 비균질적이고, 역동적이며 생성 중인 시간이 있다. 결국 현대 영화의 특질은 운동에서 시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 시간 위에서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서〈봄날은 간다〉가 사랑의 담론인 동시에 시간의 담론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실체는 위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시간을 통해서 사유된다. '반 박자'의 차이를 통해서 사랑은 그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들뢰즈의 논리를 따르자면〈봄날은 간다〉와 다른 멜로 영화와의 차이는 현대 영화와 그 이전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차이와 유사하다 (내러티브, 즉 운동을 지향하는 대다수의 멜로 영화에 비해〈봄날은 간다〉는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장소를 지향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사랑의 에쎈스가 발휘되는 부분은 영화 전체에 걸쳐 매우 적은 부분이라는 것이다.〈봄날은 간다〉가 단지 영화의 부분적인 순간에만 시간의 논리에 기대 있다면 영화는 잘 만들어진 멜로 영화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봄날은 간다〉는 특정한 순간들만이 시간의 논리에 힘을 빌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전체가 시간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사랑의 담론을 넘어서고 있다.

4 or 3'

일상은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고, 좀 더 큰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시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中)
〈봄날은 간다〉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일상에 던져진 사랑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사랑의 일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이란 매우 낯익은 개념이다. 언제부턴가 일상에 특권적인 의미가 부여되면서, '일상성'의 문제는 모든 담론에 있어 기본 어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봄날은 간다〉도 역시 이 일상성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일상성이란 무엇인가? 일상성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은 삶에 있어서 곧 지속을 의미한다. 부분들로 나뉘어질 수 없는 연속체로서 추상(抽象)할 수 없는―즉, 뽑아 낼 수 없는 무정형의 덩어리. 여기서 일상이 나뉘어 질 수 없고, 추출될 수 없다는 것은 일상이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시간 개념―즉 지속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우리의 내면적인 삶의 실재는 단지 검증 가능한 현상들의 집합이 아니고, 지속이며 흐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입장은 시간이 균질하지 않고 계량화될 수도 없으며, 시간은 존재 외부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존재 내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봄날은 간다〉에서 일상에서 관찰된 사랑의 총체적인 모습은 상우와 은수의 사랑이 완성되고 와해되는 과정(흐름)이다. 상우와 은수의 일상적인 행위들은 이러한 사랑의 과정들을 촘촘히 메우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의 일상적인 언어와 몸짓은 매순간 '이미 끝나버린 것'이 아닌 '무언가가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영화 속에서 그들의 일상적인 행위가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향해 지속되는 과정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봄날은 간다〉를 '검증 가능한 현상'들에 집중에서 바라본다면 영화는 관객에게 아무것도 전달해 주지 않는다. 상우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단지 지루한 롱 테이크일 뿐이며, 알몸의 상우가 은수의 등을 긁어주는 것은 싱거운 '베드씬'일 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일상적인 행위들이 사랑과 상실의 언어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지속이라는 시간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동시에〈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에쎈스가 추출될 수 있었던 것, 반 박자의 차이가 사랑의 날카로움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의 비균질성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장면들이다. 이처럼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시간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시간의 지배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영화는 넌센스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시간은 모두 사랑의 시간들로만 환원되는가?
영화는 사랑이 지속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삶이라는 더 큰 지속에 사랑을 위치시킨다.〈봄날은 간다〉는 상우와 은수만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없는 분산적인 내러티브를 취하고 있다. 사랑의 설레임과 아픔을 겪는 주인공 옆에서 아버지는 노래방 기기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고모는 화투를 친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꾸만 역(驛)으로 할아버지를 기다리러 가신다. 이처럼 상우에게는 가족이, 은수의 아파트와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이 사는 오래된 한옥이 있다. 영화는 사랑의 시간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사랑의 시간 그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긴 삶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우와 은수는 사랑의 시간 보다 더 깊은 삶의 지속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이 과정이라면 사랑 또한 삶의 한 과정인 것이다. 〈봄날은 간다〉가 전반적으로 멜로 영화의 색채를 띠면서도 매순간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삶이라는 거대한 지속이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봄날은 간다〉는 멜로 영화인 동시에 상우라는 한 남자의 가족사적인 영화가 되고 성장기 영화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영화를 지배하는 지속이라는 시간의 성격은 무엇인가? 현재의 끊임없는 연속인가, 아니면 과거의 한없는 축적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가오는 미래의 쉼없는 준비과정인가? 영화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