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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거짓의 사람들 - M.스콧 펙

by eunic 2005. 2. 28.

정희진의 책읽기

<거짓의 사람들> M.스콧 펙

아무 생각없이 건넨 선물
당신도 '악의 축'이 될 수 있다.


관계라는 이름의 모든 전쟁에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때리는 사람은 맞는 사람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타인을 의도적으로 억압하거나 고통을 주는 가해자는 드물다.
대개 우리가 받는 상처는 상대방과 내가 가진 권력의 차이, 그로 인한 입장의 차이 때문이다.
물론 이 차이를 이해해야 하는 사람은 사회구조적 차원에서든 개인간 감정의 권력 관계에서든, 힘없는 자다.
이라크 침략을 지지하는 미국인이나, 아내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남편이나, 지역할당제를 역차별로 생각하는 서울 사람들 모두, ‘가해자’로서의 죄의식보다는 피해의식이 큰 사람들이다.
이들 각자는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을 고문하면서 옆 동료와 자녀에게 무슨 장난감을 사 줄까를 의논하는 경찰은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일까.
아니, 어떨 때 우리는 나쁜 사람이 될까 정말 누가 ‘악의 축’일까 왜 악은 악을 지목해야만 생존이 가능할까 인간의 역사에서, 개인의 삶 속에서 악의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면, <거짓의 사람들(People of the Lie)>(윤종석 옮김·두란노·1997)은 가장 탁월한 저작 중 하나일 것이다.
위험한 매력으로 가득 찬 이 책의 저자 스코트 펙은 <끝나지 않은 길> 등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이 강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다.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제목은 <악의 심리학>이었다.
악의 심리라는 말이 다소 종말론적이고 심판자적이지만, 이 책은 악에 대한 대단히 정치(精緻)한 다학문적 분석서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악을 접근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 책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읽다보면 저자와 별로 갈등하지 않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이 책은 강박증, 자폐, 아동학대, 베트남 전쟁, 제노사이드(인종청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사례들은 공히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며 성찰적 긴장을 요구한다.
저자는 위험한 책이라고 양해를 구하는데, 내가 보기엔 위협적일 정도다.
스코트 펙은 나의 목에 칼을 들이민다.
악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심리와 행위에 내재한다. 권총으로 자살한 형의 죽음에 충격 받은 둘째아들에게 크리스마스에 총을 선물하는 부모의 사례가 나온다.
아들은 이 선물을 자살 명령으로 받아들이지만, 부모는 자기 행동의 의미를 전혀 모른다. 오히려 아이가 문제라고 비난한다. 부모로서의 권력,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고 잘못을 약자에게 미룬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그 관계에 참여하는 개인/집단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는 다르다.
‘강자’가 그것을 성찰하지 않을 때 ‘가해자’가 된다.
약자의 상처와 고통은 필연적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다.
생각하기를 미루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 방관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악이다.
그는 또한 공격하는 방어 기제, 투사(投射)도 대표적인 악의 모습으로 본다.
자신과 직면하기를 두려워할 때,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피하기 위해 타자를 찾는 순간, 누구나 ‘악의 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학 강사 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