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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책 동맹속의 섹스 - 캐서린 H.S. 문

by eunic 2005. 2. 28.

정희진의 책읽기


<동맹속의 섹스> 캐서린 H.S. 문
미국은 남성이고 한국은 여성일까
기지촌 성매매는 한국 정부의 선택


부시의 침략이 시작된 후 지난 며칠 동안 ‘평화’로운 일상을 이토록 비루하고 적대적으로 견딘 적도 없던 것 같다.
공동선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모든 인간 행위가 너무도 순진하고 허무하게 느껴진다.
공황 상태에서 거리를 헤매다가 생각의 길을 잃은 이는 나뿐만이 아니리라.
미국 외의 세계는 싸울 기회조차 없는 패자가 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겁먹고 비굴한 정부의 파병 결정을 보면서 새삼 드는 의문은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두려움이 크지만 여전히 전쟁과 일상을 별개로 간주하는 현실적 삶에도 의문을 던진다.
기지촌 성매매를 해부한 <동맹 속의 섹스(Sex among Allies)>(이정주 옮김·2002·삼인)는 이에 대한 탁월한 답변이다.
이 책에 대해 “국가 안보에 희생당한 여성”이라는 해석은 적절치 않다.
미국 웨슬리 대학에 재직중인 한국계 미국인 캐서린 문의 박사논문 <동맹 속의 섹스>는 여성주의 시각의 ‘우월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장기수 ‘선생님’(남성은 역사의 주체), 정신대 ‘할머니’(여성은 역사의 피해자)라는 언설처럼 정치의 행위자는 언제나 남성으로 상정된다.
이 책은 여성의 고통은 그 여성을 소유한 국가간, 민족간, 남성간 갈등의 부산물이라는 기존 국제정치학의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할 뿐 아니라,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선언이 계속되는 현실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여성에게 조국은 포주였다
기지촌 성매매는 선택의 문제

고려시대 조공으로 바쳐졌던 환향녀(還鄕女·‘화냥년’의 유래), 일제 시대 정신대의 맥을 잇는 오늘날 기지촌 성매매는 한국이 미국보다 힘이 약하기 때문에 발생한 불가피한 문제일까 국가간에 세력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동적으로 약소국 여성이 강대국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령 미국은 군사력, 경제력 등에서 이탈리아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미국인들이 더 ‘사고’ 싶어하는 것은 이탈리아 여성이 아니라 이탈리아산 가죽 제품이다. 미국보다 힘없는 나라지만 걸프전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미군의 자국 여성과의 성적 접촉(강간이든 현지처든 매춘이든)을 강력하게 막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보다 여성 차별이 심한 국가지만, 미군은 그 나라 여성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캐서린 문은 기지촌 성매매가 불가피했다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지촌 건설은 기생 관광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가 분단 체제 지속을 위해 미국 남성에게 자국 여성을 ‘팔아먹은’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였음을 정부 문서, 군 기밀 서류, 인터뷰를 통해 치밀하게 논증한다.
동시에 기지촌 매춘여성은 국제정치의 희생자가 아니라 한미 ‘동맹’ 관계에 상수(변수가 아니라)로 작용한 중요한 정치적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와 미군 모두에게 학대와 폭력에 시달린 그들의 일상이 바로 전쟁 상태였다. 평화는 전쟁 전후에 혹은 반대편에 있지 않다. 여성에게 평화란 자기 삶에 통제권을 갖는 상태를 말한다.

여성학 강사/ 정희진 한겨레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