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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우리’도 ‘한나라’도 아니야

by eunic 2005. 2. 28.
‘우리’도 ‘한나라’도 아니야
[한겨레 2004-04-28 17:55]
[한겨레] 인간은 각자의 섬에 산다. 그래서 서로 무관하다. 하지만 이것은 바다 위에서 세상을 봤을 때 이야기고, 바다 밑에서 보면 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인간 사회의 억압과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모든 정치적 투쟁에서, 분리주의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인종 차별, 동성애, 장애 인권 운동 등 다양한 ‘소수자’ 운동 중에서도, 특히 여성운동에는 ‘분리주의’라는 비판이 늘 따라 다닌다. 여성은 여성운동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노동운동이나 민족해방 등 ‘전체’ 운동에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의 ‘분리주의’를 두려워하는 것은 가족, 국가, 시민사회, 교회, 학교, 노동조합 등 대부분의 남성 조직이 실상은 여성의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이다. 분리주의라는 비난은 전체, 보편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데, 이때 보편은 지배자의 경험이 과잉 일반화된 권력의 효과이다. 여성의 처지에서 보면 남성의 행동이 ‘분리주의’일 수 있고,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노동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본가가 ‘국론 분열’ 세력일 수 있다.

한국사회는 일부 특권층의 입장이 객관과 보편으로 당연시되고, 약자의 시각은 편협하거나 보편에 미치지 못하는 특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지배세력이 자신의 주관성, 부분성을 성찰하기 힘든 사회다. 한국의 언론사들은 보수, 진보라는 자신의 정치적 태도와 상관없이 ‘정론지’, ‘민족지’, ‘종합일간지’를 표방한다. 신문사가 자기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불편 부당(不偏不黨)을 지향하는 정론지’가 가능한지 의문이다. 누구의 입장이 ‘정론’인가 자기 생각을 ‘정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신문에 보도되는 이야기들은 인간 사회의 ‘종합’이 아니라 한 측면이다. ‘종합일간지’라고 말하지만, 실제 기사는 특정한 시각에서 취사 선택된 결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이슈를 다루는 것 같지만,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집단, 세력화 되지 못한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문제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정당 정치도 ‘종합일간지’ 사고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은 정치적으로 부적합한 명칭일 뿐 아니라 스스로 불가능한 임무를 자처하는 이름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 세력에게 열려 있고 한 나라를 대표하며 모든 국민을 ‘우리’로 여기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계적으로 말한다 해도, 인구 비례대로 국회의원의 15%는 각각 장애인과 동성애자에게, 50% 이상은 여성에게 그리고 나머지 의석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비명문대’ 출신에게 배분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총선에서 선출된 여성 국회의원 39명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이 결과를 급격한 진보라고 보는 것은 여성의 현재를 여성의 과거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이는 불평등 논리다. 여성의 현재를 남성의 현재와 비교한다면 갈 길이 멀다.

물론 위와 같은 주장은 ‘역차별’, ‘소수자의 특권’ 심지어 ‘여성 상위’라고 공격당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정당들은 종합 정당을 지향하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는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만 등용(사실은 동원 혹은 간택)된다. 녹색당, 여성당 등 당파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당은 출현하기 힘들다.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다.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성골’은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정체화하지 말고, 자신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운동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연대이지, ‘전국 정당’으로 대표되는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