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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스와핑을 위하여

by eunic 2005. 2. 28.
스와핑을 위하여
[한겨레 2003-12-03 18:51]
[한겨레] ‘북핵 문제’라는 말은 조지 부시의 언어다. 이 말은 이미 북한에 핵이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 이러한 명명에서 문제 집단은 전쟁을 일으키려는 미국이 아니라 핵을 보유한 것으로 가정된 북한이 된다. 대개의 사회적 논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여성문제에 관련한 논쟁도 그 논의 구도 자체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양성 평등’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내가 피하는 말들 중 하나다. ‘북핵 문제’처럼 이러한 용어들은 자신의 고통을 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딜레마를 압축한다.

‘양성 평등’은 인간이 두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로 태어나는 사람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양성의 경계를 문제화하는 트랜스젠더 같은 성적 소수자를 ‘제3의 성’으로 전락시킨다. ‘여성의 사회 진출’ 그렇다면, 여성이 생활했던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로 인해,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논쟁 구도 자체가 중산층 남성의 시각에서 구성된 대표적인 예가 배우자 교환 섹스, 스와핑이 아닌가 싶다. 성 보수주의(‘타락이다’)와 성 자유주의(‘사생활이다’)의 구도로 진행된 이 논쟁은 스와핑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을뿐더러, 이러한 ‘보수’와 ‘자유’는 모두 여성 억압을 정당화·정상화한다. 남편의 강요로 아내가 스와핑에 참가했을 것이다, 교환 섹스에 참여한 여성은 아내가 아니라 유흥업소 종사 여성이었다 등의 스와핑에 대한 항간의 ‘조롱’은, 역설적으로 스와핑의 급진성을 말해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부일처제 가족의 기본 기능은 계급의 재생산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스와핑은 여성의 성에 대한 이중 잣대와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항거’다. 스와핑을 성적 타락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의 스와핑에 대해 격분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스스로 ‘지도층’의 섹슈얼리티를 모방해야 할 규범으로 삼기 때문이다.

스와핑 비난의 근거인 “일부일처제의 신성성”은, 대한민국이 마치 일부일처제 사회인 듯한 착각을 유도한다. 그러나 역사상 단 한번도 일부일처제가 실현된 사회는 없었다. 부계 가족의 영속은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만 강요되어 온 규율이었다. 일부일처제 현실은 가면극일 뿐이다. 남성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보완하기 위해 성매매, 축첩, 외도 등 다양한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실질적인 일부일처제가 가능하려면, 모든 정치·경제 권력의 반 이상을 여성이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남성은 언제 어디서든 한 명 이상의 여성을 취할 수 있다. 이때 여성은 교환가치로서, 남성 간에 ‘유통’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반면, 스와핑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논리는,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역시, 마치 모든 사람에게 프라이버시 권리가 있는 것 같은 환상을 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개인이 될 수 없다. 가정이 사적인 공간일까 아마도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에게 가정은 노동의 공간이고, 프라이버시를 침해받는 영역이다. 여성이 타인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사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려면, 남성과는 반대로 가정 밖으로 나와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성생활은 프라이버시 영역일까 아마도 이성애자 남성에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자나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공적인 이슈이며, 정치적 투쟁의 장이다.

스와핑 실천의 ‘급진성’에 비하면, 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사유는 너무나 가난하고 상상력이 없다. 스와핑이 ‘아니라’ 스와핑에 대한 해석이, 내겐 더 위험스러워 보인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