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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여배우는 늙지 않는다

by eunic 2005. 2. 28.

여배우는 늙지 않는다


[한겨레]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나이를 초월한 30대 언니들의 전성시대
… 90년대 멜로 시절 이미지 관리하며
영화·드라마 종횡무진


고현정이 돌아왔다. 고현정 신드롬과 함께 돌아왔다. 10년 전 모습 그대로.<봄날>은 시청률 30%에 육박하고 있고, 벌써 10억원짜리 광고 계약을 마쳤다.
네티즌들은 “34살 고현정의 외모 나이는 25살”이라고 감탄해 마지않는다.극중에서도 20대 중반이지만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고소영이 돌아온다. 올해 안에 영화를 찍을 작정이다. 연예기획사와 5억원에 계약도 맺었다. 2003년 1월 영화 <이중간첩> 이후 2년 만이다.
심은하의 복귀설이 끊이지 않는다. 팬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다. 열성팬들은 영화제에 펼침막을 들고 나가 복귀를 호소한다. 심은하의 마지막 작품은 2000년 개봉한 영화 <인터뷰>.

심은하는 몇년 만에 돌아올까?

20대 남자와 연인돼도 어색하지 않아
돌아온 언니들 말고, 지켜온 언니들도 있다. 2004년 대장금 신드롬을 일으킨 이영애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찍고 있다. 김혜수는 드라마 <한강수 타령>에 출연 중이고, 공포영화 <분홍신> 촬영에 들어간다. 전도연과 이미연도 차기작을 고르고 있다. 엄정화는 <12월의 열대야>를 끝내고 쉬고 있다.

그들을 만난 지 10년이다. 1993년 <엄마의 바다>의 톡톡 튀는 경서를 기억하는가? 94년 <마지막 승부>의 다슬이가 떠오르는가? 94년 <모래시계>의 혜린이가 그리운가? 고현정(34), 고소영(33), 이영애(34), 심은하(33), 김혜수(35), 전도연(32), 이미연(34), 엄정화(36)…. 아직도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몇해 전에 서른의 문턱을 넘었다. 90년대 초·중반에 배우생활을 시작했다(88년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데뷔한 이미연은 예외다). 강산이 바뀌었지만, 그들은 여전하다. 추억의 여배우가 아니라 절정의 여배우들이다.

아직도 20대 연기가 어색하지 않다. 여배우는 늙지 않는다.

30대 여배우와 20대 남자배우 커플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영화 <인어공주>에서 전도연의 상대역은 박해일이었다.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의 짝은 유지태였다. 모두 20대 남자 연기자들이다. 심지어 ‘친절한 금자씨’ 이영애는 88년생 김시후의 짝사랑을 받는다. 김광수 청년필름 대표는 “손예진, 하지원 같은 20대 초반의 여배우는 그래도 있지만, 20대 중·후반의 여배우들이 별로 없다”며 “연륜 있는 멜로의 20대 중·후반 역에 30대 여배우를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렇게 투톱으로 남녀배우를 붙이면 30대 여배우, 20대 남자배우의 조합이 나오게 된다. 30대 여배우와 20대 남성, 30대 남성의 삼각관계는 드라마의 공식이 됐다. <봄날>에서 고현정은 30대 지진희, 20대 조인성과 삼각관계에 빠진다. 지난해 방영된 <12월의 열대야>에서 엄정화는 연하의 김남진과 연상의 신성우와 호흡을 맞췄다. <두 번째 프러포즈>에서 오연수(32)는 남편 김영호와 헤어지고 연하남 오지호의 사랑을 받았다. 앞으로도 연상연하 커플이 양산될 기세다.

지난해 연말 영화 사이트 ‘엔키노’는 네티즌에게 “오랜 시간이 지나가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여배우”를 물었다. 30대 ‘언니’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심은하가 48.3% 지지로 압도적 1위, 이영애가 2위, 고현정이 5위를 차지했다. 20대 스타 중에는 전지현이 유일하게 3위에 올랐다. 4위는 ‘큰언니’ 이미숙이었다.

여전히 대중들은 그들을 잊지 못한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여배우 전성시대의 마지막 스타들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심 대표는 “90년대는 새로운 감성의 멜로 드라마들이 쏟아져나오던 시기”라며 “그들은 그 시절의 여주인공이었다”고 설명했다. 90년대 중반, 전도연은 <접속>으로,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스타를 뛰어넘어 배우로 거듭났다. 90년대 말 이후,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 시스템을 따라가면서 블록버스터 남성영화가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자연히 여배우의 세대교체도 어려워졌다. 30대 여배우들이 여전히 ‘톱’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다.

영화가 건져줬나, 반짝스타 아니네
무게감 있는 작품에 출연해 깊은 인상을 남긴 점도 오래 기억되는 이유다. 주유신 영화평론가는 “한국의 현실에 말을 걸고, 인간 존재에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의 무게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현정의 <모래시계>는 80년대 역사의 풍랑에 휩쓸린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더구나 90년대 말 이후의 트렌디 드라마는 이전에 비해 더욱 가벼워졌다. 배우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주 평론가는 “문화산업의 순환주기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캐릭터가 점점 기표처럼 소비된다”며 “고현정, 심은하 등은 예외적으로 소비주의의 속도에서 벗어난 존재들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90년대 말부터 연예산업이 성장하면서 스타의 생명력이 오히려 짧아졌다. 구본근 SBS PD는 “산업화될수록 상품을 만들려는 의도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며 “연기자가 되기 전에 스타로 소비되다 주저앉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스타 시스템이 스타를 잡아먹은 것이다.

여배우의 전성기는 한국 영화의 부활과 맞물려 있다. 90년대 시작된 한국 영화의 전성기는 여배우들의 활동폭을 넓혀주었다. 20대 초반 드라마에서 반짝 떴다가 금세 사라진 선배들의 비운을 반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고 가면서 자연스레 ‘관리’도 됐다. 대중들도 식상하지 않게 됐다. 영화가 구원한 여배우들도 많다. 안방극장에서 주연과 조연을 오고 갔던 전도연은 <접속>을 통해 대표적인 여배우로 거듭났다. 영화 <인디안 썸머>는 슬럼프에 빠진 이미연을 구해주었다. <장화 홍련>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염정아를 구원했다. 검증된 배우를 선호하는 영화 시스템은 이들의 ‘필모그래피’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김광수 청년필름 대표는 “드라마는 배우실험을 하지만, 영화는 모험을 하기 어렵다”며 “검증된 배우를 선호하다 보니 30대 여배우를 캐스팅하게 된다”고 말했다. 검증된 배우라야 투자가 되기 때문이다.

여성 캐릭터도 다양해졌다. 80년대까지 영상매체 속의 여성은 바비인형이거나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남성의 시선에 포획돼 있었다. 예쁠 뿐 아니라 젊어야 여주인공으로 살아남았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여성의 욕망이 스크린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여성 캐릭터가 청순가련형 일색에서 커리어우먼, 미시족 같은 다양한 캐릭터로 진화했다. 여배우들의 생명연장의 꿈은 현실이 됐다.

김혜수가 그 혜택을 받았다. 최근에는 <두 번째 프러포즈>의 오연수가 당당한 이혼녀 캐릭터를 통해 연기자로 거듭났다.

여배우들의 달라진 인생 행로도 연기 인생에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선배들은 결혼과 함께 사라졌다. 인기 ‘여우’들은 한창 때에 좋은 곳으로 시집간 것이다.

하지만 30대 여배우들은 절정에서 결혼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이혼과 함께 돌아왔다. 그들은 나이를 초월하려고 한다. 특히 고현정, 심은하가 그렇다. 여전히 20대 같다. ‘여성’으로 살아남은 배우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청순하고 고상한 이미지다. 상류층을 연기해도 어색하지 않고, 지적인 이미지가 풍긴다. 생활과 거리가 있는 ‘숭배’의 대상에 가깝다. 김혜수, 고소영도 극중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다.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는 “여배우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캐릭터를 개발하는 모험을 하지 않고 기존 캐릭터에 안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영화 관계자는 “보통 30대라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을 나이지만 30대 여배우들은 제 나이의 역할을 제안하면 거절한다”며 “애 엄마로 나오면 광고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30대’를 연기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30대 여배우는 건재하지만, 30대를 연기할 배우는 드물다. 30대 여배우들은 “시나리오가 없다”고 불평하고, 제작자들은 “여배우가 없다”고 한탄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심재명 대표는 “수요와 공급 모두 아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 영화의 중심이 남성영화로 옮겨간 탓도 있지만, 여배우들이 과감한 도전을 꺼리는 이유도 있다. 제 나이에 맞는 역할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30대 여배우는 드물다. 일부 여배우들은 아예 광고로 연명하면서 연기는 개점 휴업인 경우도 있다.

그래도 30대 여배우들은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는 세대다. 배우와 팬들이 함께 늙어가기 때문이다. 주유신 평론가는 “예전에는 10~20대만이 문화 소비층이었지만, 요즘에는 30~40대도 문화 소비자로 떠올랐다”며 “30~40대를 겨냥한 작품들이 나오면서 30대 여배우들의 생명력도 길어졌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팬들은 늙지 않는 스타들에게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30대 팬들은 “여전히 20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고현정에 감탄하지만, 우리의 스타가 우리와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자연스레 늙는 것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어쩌면 30대의 ‘나이 든’ 여배우가 전성기를 구가한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이병헌(35), 배용준(33), 장동건(33), 정우성(32) 같은 30대 여배우들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동년배의 남자배우들은 아직도 ‘자연스레’ 전성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이는 성차별적이다.

‘불혹’도 아름다워~
이미숙(46)과 황신혜(42)는 여전히 아름답다. 도통 늙지 않는다. 두 여배우는 한국 드라마의 나이 공식을 깼다. 젊은 여주인공에서 잠깐 이모를 거쳐 어느새 어머니가 되는 한국 여배우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나아가 어머니/여성의 이분법도 깼다. 과거 한국 영상매체에서 어머니는 여성이 아니었고, 여성은 어머니가 아니어야 했다. 여성 캐릭터는 그렇게 남성의 시선에 포획당해 있었다. 어머니면서 여성인 존재는 ‘악녀’ 아니면 ‘괴물’이었다.

하지만 40대 주부 이미숙은 영화 <정사>에서 시동생 이정재와 불륜에 빠졌고, 드라마 <고독>에서 류승범과 사랑을 나누었다. <스캔들>에서도 배용준을 유혹하는 친척 누이를 연기했다. 이미숙은 1월21일 전파를 타는 SBS 드라마 <사랑의 공감>으로 3년 만에 안방극장에 돌아온다.

83년 데뷔한 황신혜(42)도 ‘애인 같은 아내’ 이미지로 연하의 배우들과 연기했다. 황신혜는 지난해 드라마 <천생연분>에서 연하의 안재욱과 호흡을 맞추었다. 극중에서도 연상연하 커플이었다. <천생연분>은 36살 노처녀 스튜어디스 종희(황신혜)가 남동생의 친구인 5살 연하의 석구(안재욱)과 결혼하면서 생기는 좌충우돌을 다룬 드라마다. 황신혜는 <애인>에서도 ‘바람난 아내’를 연기해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한편 30대 여배우들의 바로 윗세대인 김희애(38), 채시라(37), 최진실(37)에게서는 생활의 냄새가 난다. ‘아줌마’ 역할이 자연스럽다. 김희애는 드라마 <완전한 사랑>과 <부모님 전상서>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채시라도 <애정의 조건> <해신>으로 연속 히트작을 내고 있다. 최진실도 지난해 드라마 <장미와 콩나물>로 주부 연기를 했다. 이들은 모두 현실의 결혼과 함께 극중의 주부로 변신했다. 배국남 평론가는 “나이에 맞는 배역을 찾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