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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김정운의 남자에게 - ‘정’은 가고 ‘아저씨’만 남는다!

by eunic 2011. 3. 17.

‘정’은 가고 ‘아저씨’만 남는다!

BY :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 2011.03.17

문화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독특한 개념이 존재한다. 독일어의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그렇다. 상처나 손해를 뜻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Freude)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남의 슬픔·고통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경우다. 그러나 이 경우는 문장이다. 개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혼돈스러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개념을 만들어낸다. 일단 개념이 한번 성립하면, 이 개념은 역으로 또다른 실재를 만들어낸다. 개념과 실재 사이에 성립하는 상호규정의 관계를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r Zirkel)이라고 한다. 이야기 혹은 개념이 어떻게 현실을 규정하는가를 푸코는 섹슈얼리티에 관한 근대 담론의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샤덴프로이데’라는 독특한 독일적 개념은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가학적 실재가 된다는 이야기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샤덴프로이데’라는 개념이 가능하냐며 독일 문화를 비난하지만, 슬그머니 자신들의 언어로 토착화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 우리에게도 있다. ‘정’(情)이다. 서구의 ‘사랑’과는 구별되는 아주 독특한 개념이다. 서양인들은 사랑하지 않으면 이혼한다. 그래서 아침마다 남편들은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아이 러브 유’를 외친다. 전화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한다. 거의 강박적이다. 사랑이 끝나면 관계도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적어도 중년 이상의 부부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함께 살았다. ‘그놈의 정’ 때문이다. 요즘 이혼율이 늘어나는 이유는 ‘그놈의 정’이 개념적으로 더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과 한국적 현실의 해석학적 순환이 이제 막을 내렸다는 뜻이다. 푸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정’이라는 권력담론이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결과는 고스란히 중년남자들의 몫이 된다.

 더이상 ‘정’이란 개념의 ‘권력 프리미엄’을 누릴 수 없는 불안한 한국 중년남자들을 설명하는 새로운 개념이 구성된다. ‘아저씨’다. 물론 이전에도 ‘아저씨’라는 호칭은 존재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개념은 아니었다. 반면 ‘아줌마’는 호칭인 동시에 개념이었다. 품위 없고 황당한 행동을 마다않는 중년여성들을 이해하기 위해 ‘아줌마’라는 호칭이 문화적 개념으로 전환되어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중년의 여인을 ‘아줌마’라 부르면 은근 기분 나빠 했다. 반면 ‘아저씨’는 가치중립적 호칭이었다. ‘아저씨’라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사뭇 달라졌다.

 ‘아저씨’는 이제 무례하고, 거칠고, 짜증나는 개념이다. ‘아줌마’와 ‘아저씨’의 문화적 의미는 일부 겹친다. 그러나 ‘아줌마’는 어느 정도 연민이 가능한 애교스러운 개념인 반면, ‘아저씨’는 ‘어디 건들기만 해봐라’ 하는 공격적인 개념이다.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검색해보라. 지하철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 쩍벌남, 침 함부로 뱉는 사람, 욕이 빠지면 말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 등등. 온갖 불쾌한 중년남성들의 이름이 ‘아저씨’인 것이다. ‘아저씨’는 권력상실의 불안에서 시작하는 무례, 분노, 적개심, 공격성의 총화다.

 물론 착한 아저씨들도 있다. 자식들에게 느닷없이 ‘사랑한다’며 황당한 문자를 보내는 이들이다. 아이들이 문자 ‘씹으면’ 너무 쓸쓸하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공사가 다망하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 어떻게든 일을 만들어 밖에 나간다. 안방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텔레비전 채널만 돌린다. 이미 여러 번 본 연속극을 다시 본다. 연속극은 죄다 슬프다. 혼자 훌쩍거리다 슬그머니 침대에 올라 잠을 청한다. 아이들과 아내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