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그는 '동굴속 황제' 일뿐"
한국일보 | 정희진/경희대 여성학 강사 | 2003.05.03
이광모의 영화 ꡐ아름다운 시절ꡑ은 미 군정기 누이와 어머니가 몸을 팔아 자신의 생계와 정체성을 지탱해 주는 한국 남성의 분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ꡐ이 영화를 할아버지, 아버지께 바친다ꡑ는 마지막 자막은 실망을 넘어 당황을 느낄 정도다. 이 영화는 한국 남성이 자신의 상처를 역사화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폭력성과 나약함, 자기 중심성에 근거한 자기 연민과 피해의식은 한국적 남성성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제국에 모욕당한 아버지를 위로하겠다는 감독의 남성 중심적 사유 안에서 여성은 가족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절대 주체인 남성은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는 서구이성애자비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서점에 가 보라. 남성이성애자ꡐ일반인ꡑ을 연구한 책보다 여성동성애자ꡐ장애인ꡑ을 논하는 책이 훨씬 많다.
권력자는 자신을 연구하거나 성찰하지 않아도 된다. 이 영화 작가처럼 인간 관계든, 거대 권력 구조에서든 변해야 할 것은 세상이나 타자이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학자 전인권(성공회대 연구교수)의 ꡐ남자의 탄생ꡑ은 주목할 만하다. ꡐ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ꡑ는 초기 페미니즘 이론의 명제는 남성에게도 해당된다. 인종 차별이 피부색에 대한 임의적 해석의 결과이듯 성별은 생물학적 필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정치적 제도이다.
ꡐ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본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남자의 정체성을 ꡐ동굴 속 황제ꡑ, 즉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동굴에 갇혀 주위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파악하면서 그러한 특성이 어떻게 획득훈련되는지를 매우 성실하고 흥미롭게 기록하고 있다. 책은 저자의 5~12세의 유년기(1960년대) 경험을 다룬다. 아버지의 이불은 다른 사람 이불에 깔리면 안되기 때문에 맨 나중에 개고 가장 먼저 펴야 한다.
아버지-형-나-남동생-누이-어머니라는 밥 푸는 순서는 밥 푸는 순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또는 국가 안의 계급 질서다. 이처럼 일상에서 피억압자가 자발적으로 규율하는 상세한 지배피지배 매뉴얼을 의식한다면 민주주의와 인권을 논하는 정치학이 바로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묻게 된다. 물론 한국의 식민성, 근대화, 가족, 국가주의를 성 인지적 관점에서 논의한 연구는 이미 조혜정, 김은실, 김현미를 비롯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해왔다.
그러나 남성이 자신의 남성성을 성찰하면서 젠더(성별 제도)를 역사적, 정치적 문제로 제기한 본격적 고해 성사는 내가 알기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한국사회에서 저자와 같이 제도교육 세례를 충실히 받은 40대 남성에게 이 책은 하나의 모험이었을 것 같다. 훈계와 계몽, 지사적 열변, 독단, 자기 도취, 서구 숭배, 거의 편집증적인 남성 중심적 시선…. ꡐ남자의 탄생ꡑ은 이런 남성 지식인의 글쓰기 방법과 시각에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 책의 모든 서술 주어는 ꡐ나ꡑ로 되어 있다. 필자, 본인, 연구자 같은 말로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는다. 부모에 대한 분석은 깊은 애정이 느껴지면서도 대단히 비판적이다. 작가 자신이 연구 도구이며 자기 가족이 주된 연구 대상이다. 이런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정치학의 상대화 혹은 재개념화가 필요하다. 그는 정치학자로서 늘 ꡒ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ꡓ라는 질문을 던져왔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비판하려는 한국사회,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자기 몸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정말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현실 정치도 국제 정치도 성차별과 연령주의에 기초한 가족 정치학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제까지 나와 세상을 망쳐온 아버지를 ꡐ살해ꡑ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의 고백대로 누군가의 단점을 안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생물학적 차이든 사회화의 결과로서의 차이든 간에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권력을 남녀 동수(同數)로 분배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때 권력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된다.
조선일보 | 정희진(여성학자) | 2004.04.03
"하느님이 남성은 직접 진흙으로 만드셨지만,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이 이야기는 여성의 열등성을 정당화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남성은 진흙으로 만들었으니 질그릇이고, 여성은 갈비뼈로 만들었으니 '본 차이나(bone china)다. 더구나 여성들이 기존의 담론에 주눅들지 않고,"누가 만들어 달랬어?" 하면 그만이다.
여성의 지위를 남편의 직업으로 설명하는 것은 성차별 논리의 하나지만, 어쨌든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총리를 지낸 리오넬 조스팽의 부인이자 사회과학 고등교육원의 철학 교수인 실비안느 아가젠스키가 쓴 이 책은 성차(性差)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생물학적 차이든 사회화의 결과로서의 차이든 간에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권력을 남녀 동수(同數)로 분배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때 권력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된다.
어느 한 성(性)도 국가 권력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남녀 동수 이론은 프랑스의 모든 정당들이 모든 경선의 입후보자 명단에 여성을 50% 포함하도록 하는 법률의 기반이 됐고, 2000년 5월 발효됐다. 뿐만 아니라 1999년 동성애 커플에게 결혼 제도의 권리를 똑같이 보장하는 팍스(PACS) 법안 제정에도 큰 영향을 미쳐, 프랑스 전역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은 양성(兩性)이 아니라 혼성(混性)이다. 기존의 양성이란 단어가 남성과 '남성이 아닌' 여성이란 의미를 함의한다면, 혼성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성(性)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간 시몬 드 보부아르 식의 실존주의 페미니즘은 양성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에, '불평등한 평등'이었다고 비판한다. 남성을 따라잡기 위해(혹은 남성처럼 되기 위해) 여성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는 것.
근대 이후 여성은 소위 '공적 영역'으로 진출했지만, 여성들이 바깥에서 일하는 만큼 남성은 집안에서 노동하지 않았다. 즉, 양성평등론은 여성이 밖에서도 일하고 가사노동도 전담하는 이중 노동 구조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9조 1항, '모든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구절처럼 국민, 인간, 시민, 민중은 모두 남성을 의미한다. 병역의 의무조차 없는 여성이나 장애인은 국민이 아닌 것이다. 남성이 인간의 기준인 상태에서는,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보편주의)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분리주의)해도 차별받는다는 것이다.
인류의 혼성성이란, 인간의 본성이 '원래'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져 있음을 뜻한다. 이렇게 인식하면 여성은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며,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남성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성차는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제도와 일상에 적용되어야 한다. 철학자인 아가젠스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이트(저자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를 포함하여)에 이르기까지 서구 지성은 여성을 '결핍된 남성' '불완전한 남성'으로 인식해왔음을 지적한다.
초월성과 내재성,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이라는 식의 대립 논리는 남성 모델에 특권을 부여한 차이의 해석 방식이다. 평등은 불평등과 대립하는 것이지, 차이와 대립하는 말이 아니다. 평등이란 같음이 아니라 공정함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남녀동수 의회 구성 논리에서 보면, 한국의 여성 할당제는 '특혜'가 아니라 당연한 '인간 본성'이며, 각각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장애인과 동성애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연] 평화와 젠더 : 일상의 공포 정치, 여성에 대한 폭력 (0) | 2007.03.08 |
---|---|
[조선일보] 군사문화가 낳은 성차별… ‘경제강국’ 디딤돌? (1) | 2007.03.08 |
[다시묻는토론1] FUCKing USA 불러도 좋은가 (0) | 2007.03.08 |
[한겨레21] 정희진 특강 남자들의 거짓말 (0) | 2007.03.08 |
[한겨레21] 감정적이라는 말 (0) | 2007.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