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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고맙다, 생로병사여/한겨레21

by eunic 2007. 1. 2.
고맙다, 생로병사여

오로지 생명 연장에만 인생을 거는 광경은 지옥도
위대한 과학자 황우석 교수님, 위대한 철학자가 되어주세요

▣ 김선주/ <한겨레> 전 논설주간·칼럼니스트

어느 날 창가에서 머리를 빗고 있는데 왼쪽 속눈썹 한가운데서 반짝 빛나는 것이 있었다. 무엇이 묻었나 비벼보았으나 그대로였다. 하얀 속눈썹 한올이었다. 앗싸 이제 속눈썹 너마저도 하며 낄낄거렸다. 이걸 당장 하면서 뽑으려다가 멈추었다. 하나둘 나오는 속눈썹을 뽑기 시작하면 속눈썹이 하나도 없는 괴물이 될 거 아닌가. 그래도 대머리보다는 백발이 낫지 하는 심정으로 아껴두기로 했다. 만물이 소생하고 신록이 싱그러운 이 봄에 음… 나는 속눈썹이 희어지는 시절을 맞는구나 싶으니까 좀 서늘해졌다.

하얀 속눈썹 한올의 단상

며칠 전에는 텔레비전 연속극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다.
김자옥이 실직한 남편 박인환의 발을 씻어주고 있었다. 변기에 걸터앉은 박인환이 생전 처음 당하는 아내의 황공한 대접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대야에 물을 받아 정성스레 남편의 발을 씻던 김자옥이 갑자기 “어쩌면 발도 늙냐, 신경질 나” 하면서 발을 탁 놓아버리고 얼굴을 돌렸다. 그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늙는 것이 어찌 발뿐이겠는가. 속눈썹이라고 비켜갈 것인가.
생로병사는 어떤 생명체도 피해갈 수 없다. 생명 속에 죽음이 예비돼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잉태돼 있는 것이 생명이다. 죽지 않으려면 태어나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는 왕궁을 떠날 때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했다. 보리수 밑에서 해탈을 하고 생로병사의 고통을 벗었지만 그 역시 여든살이 넘어 병들어 죽었으니 생로병사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치른 셈이다.


세상에는 사고로 불치병으로 갑자기 죽는 생명들도 많다. 거기에 비하면 예순 언저리를 지나 평균수명에 이르기까지 싫어싫어 하면서 늙어가고 아파하면서 병과 친구가 되고, 그러다 섭섭지 않은 나이에 생로병사의 과정을 다 거치고 죽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한 인간으로서 복된 삶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생로병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몸이 노화하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며 살며 육체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머리도 세지 않고 발도 늙지 않고 내장도 갈아낄 수 있고 난치병도 정복되고 얼굴에 주름도 없어지고, 그리고 신체 전체를 복제해 보관해두었다가 병이 들면 정비소에 보내 수리해서 다시 쓰고 그것도 안 되면 냉동했다가 소생 부활시킬 수 있다면….

줄기세포, 인간복제, 난치병 치료, 생명공학의 메카에 대한 기대로 대한민국이 온통 들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성과는 말하자면 과학자로서의 열정과 신념, 부단한 노력이 빚어낸 쾌거이고 개가이다. 과학은 물질의 영역이다. 정신의 영역이 아니다. 유사 이래 인류가 발견하고 규명해낸 모든 과학적 성과물은 집적돼 의학의 발전과 생명복제, 나아가 인간복제 수준까지 왔다. 그러나 정신의 영역이나 가치의 영역에 관한 한 인류는 수천년 전 인간의 수준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 과학이 인간을 변화·변종·개조·복제하는 데 이르면 이것은 과학만의 영역이 될 수 없다. 정치·경제·사회적 문제이며 인간과 생명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하는 일이다. 과학 자체에는 윤리나 도덕, 철학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위대한 과학자는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학자인 황 교수가 과학 아닌 쪽의 개입을 절실히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끊임없이 철학적·윤리적·도덕적 문제에 천착하고 괴로워하기를 바란다.

박정희가 줄기세포로 생명을 되찾는다면…

과학은 역사적으로 항상 힘과 권력과 돈에 복속돼왔다. 에이즈 치료약이 개발됐지만 아프리카인들이 값싸게 이용할 수 없어서 해마다 수백만명씩 쓰러져간다. 제약회사들이 위약을 만들 권리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병든 육체는, 불치의 병은 본인과 가족에게는 크나큰 불행이다. 그러나 병든 정신에 건강한 육체, 불멸의 육체는 인류에게 재앙이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았지만 병원에 가서 줄기세포로 생명을 되찾는 것을 상상해보자. 저출산과 노령화로 노인 인구가 메인 스트림이 되는 21세기 중반 이후 150살의 노인들이 눈도 갈아끼고 간도 갈아끼고 돈도 움켜쥐고, 새로운 생명은 탄생하지 않고 최초의 아무개와 제2의 아무개가 오로지 장수에만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눈을 번득이는 광경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지옥도다. 월트 디즈니를 비롯해 세계에 네개 있다는 냉동인간회사에 1천여구의 인간이 냉동 보존돼 있다고 한다. 2045년에 소생될 전망이었으나 생명공학과 나노공학의 진전 덕에 20년이 앞당겨지리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인간에게 죽지 말고 불멸하라는 것은 저주다. 시몬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엔 죽지 않는 인간이 나온다. 그의 소원은 죽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젊은 얼굴로 다시 살아나는 그 불멸은 그에게 내려진 신의 저주다. 모든 인간은 최초의 인간이 가졌던 의문, 왜 태어나서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그대로 가진 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태어난다. 인간이 존귀하고 생명이 존중돼야 하는 것은 모두에게 단 한번의 생이고 각자가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똑같은 무게로 생과 맞서야 한다. 거기에서 도덕도 가치관도 철학도 생겨났다. 일회적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고 수십년 뒤에 부활 소생할 수 있다면 인류의 역사는 새로이 쓰여야 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현자와 철학자와 문학적 성과물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비롯됐다. 여기까지다, 내가 아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나 내가 받은 교육,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치관은 바로 여기까지다. 단 한번의 선물인 생을 기쁘게 누리고 가는 것. 두 번째 김선주, 세 번째 김선주는 노 땡큐다. 고맙다, 생로병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