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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아버지와 용돈, 그리고 재떨이/한겨레21

by eunic 2007. 1. 2.
아버지와 용돈, 그리고 재떨이

언니에게만 몰래 용돈을 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질투로 몸을 떨다가
내색 않고 내 방 청소를 해주시던 추억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네

▣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위원

매사에 시큰둥해서 길게 말을 하는 법이 없는 둘째가 평소와 달리 제 아버지에게 길게 불평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스무살이 넘도록 아빠가 한번이라도 저한테 용돈 줘본 적 있어요?’라고 정색을 했다. 당황한 남편은 “야, 용돈은 엄마가 주는데 내가 왜 주냐. 아빠는 월급을 몽땅 엄마에게 주는데 나한테 무슨 돈이 있겠냐”라며 우물쭈물 더듬더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옆에 앉아 있던 큰놈이 ‘뭐, 아빠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냐’라는 표정으로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남편은 아들에게 용돈을 주고 있을까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내 남편이 엄마한텐 비밀이다 하면서 나 몰래 아이들 주머니에 돈을 찔러줘본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니…. 그렇다면 아이들은 항상 내가 정해놓고 주는, 그들이 보기에 인색했을 용돈 이외에는 한푼도 가질 수 없었던가 하는 생각에 아이들이 불쌍하고 안쓰러워졌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껏 참고 있었다면 부모에게 품고 있을 또 다른 원망이나 불평은 얼마나 많을까 싶어졌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나. 때론 간식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몰래몰래 금지된 짓, 금지된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 아닌가. 속으로 계속 구시렁거렸다.

그날 이후 남편이 나 몰래 아이들에게 1년에 한두번이라도 돈을 준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남편도 아들도 말을 안 하니까. 당시 남편의 표정으로 미뤄볼 때 자신이 아버지 노릇을 잘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의 기미가 역력했기 때문에, 나는 남편이 지금은 아들들에게 나 모르게 돈을 주기도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도 용돈과 관련해서 아픈 기억이 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떤 거리를 지나가는데 손윗언니가 바로 저기가 아버지 회사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회사로 찾아가면 용돈을 잘 주셨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머리가 띵해졌다. 나는 아버지 회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한번도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큰언니는 맏이어서 기대도 컸고 부모가 힘이 있을 시절에 사춘기를 보냈으므로 여러모로 엄청난 특혜를 본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몸이 약한 둘째언니는 어쩔 수 없는 배려를 부모에게서 받았다.

그러나 손윗언니는 왜 특혜를 받았지. 왜 아버지는 언니에게만 용돈을 몰래 주었지. 왜, 왜, 왜 하는 동안 수십년도 지난 그 불평등한 취급이 억울해서 그야말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언니는 계속 추억을 더듬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로 용돈을 부탁하고 회사로 찾아가면 한번도 맨돈을 주는 법 없이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주셨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더 많이 받은 딸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사진/ AP연합)

같은 대학을 다니며 같은 용돈을 탔는데도 언니는 옷을 잘 사 입어서 그게 어디서 난 돈인지 항상 불가사의했는데, 수십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것이 아버지가 준 용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야속하고 억울했다. 나는 그렇게 사랑받을 만한 딸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에 쉰살이 넘은 여자가 질투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 정말 그랬다. 자라는 동안 크게 아픈 적도 없고, 공부는 엉터리로 했지만 입시에서 실패한 적도 없고 별로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자랐다고 자부하는 나인데, 아버지는 왜 나를 언니보다 덜 사랑했을까. 아버지 일주기 때 나는 아버지 무덤가에 가서 왜 아버지는 나에겐 용돈을 안 주고 언니만 주었냐고 속으로 물었다. 어느 만큼 시간이 지난 뒤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했더니, 어머니는 우는 아이 젖 주는 법이라면서 네 언니는 항상 무언가를 사고 싶어했고 너는 특별히 돈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기억해보라면서 자식마다 비밀이 있으면 그것을 지켜주고 각자의 요구에 따라 사랑하셨다고 했다.

넓은 울타리가 돼주고 믿어주면…

20대 때 신문기자를 한답시고 술 마시고 늦게 귀가했다가 아침이면 정신없이 출근하던 시절, 밤에 들어오면 나의 방은 항상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널려 있던 책은 책꽂이에, 레코드판은 나란히 제자리에, 마구 벗어놓은 옷들은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재떨이는 깨끗이 비워져 물로 씻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머니가 한 일로만 알고 있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모르시리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내 방을 치워놓은 사람이 아버지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매일 내가 출근하고 나면 내 방에 들어와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고 재떨이를 물에 씻으시면서 어머니에게 “우리 막내딸이 남자로 치면 한량 중의 한량이다”라며 웃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도 나에게 방청소를 해준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 언니는 아버지에게 용돈을 두둑하게 받았을지 몰라도 재떨이까지 치워주는 그런 사랑은 못 받았지 싶으니까 비로소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이 풀렸다. 아버지는 내 방 청소를 해주시고 어머니는 매일 아침 아무런 잔소리도 없이 밥상에 술국을 내놓으셨다. 그 추억을, 나는 가끔 꺼내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들이 나의 비행을 잘 알면서도 모른 체하면서 보여줬던 절대적인 신뢰 같은 것을 나는 죽었다 깨어도 못한다. 일일이 잔소리를 하고 싶어서다. 다만 내 아들 방에서 다른 것은 치워주지 않아도 재떨이를 비워주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것만은 절대로 잔소리하지 않고 해준다. 평생 담배도 술도 안 하신 양반이 막내딸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하는 것을 모른 체하시며 조용히 우렁이 각시처럼 방을 치워주시던 심정을 생각하면서.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선택해서 낳을 수는 없다. 부모 노릇 면허증을 받고 부모가 되는 사람도 없다. 아이들이 나를 어떤 부모로 추억할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부모도 자식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처럼, 자식도 부모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나를 포함하여 요즘의 부모들은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관찰하고 일일이 간섭하며 자식의 인생에 너무 깊게 개입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넓게 울타리가 돼주고 믿어주면 자식도 거기에 부응한다는 사실을 내 경험을 통해 잘 알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