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다운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는 떠남은 얼마나 위대한가
▣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칼럼니스트
알 만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유언이 무엇이었을까, 무슨 말을 남겼을까,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가 궁금하다. 백남준 선생은 내 젊은 시절 우상 중의 한 분이시다. 보도에 의하면 부인은 백 선생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었기에 유언장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말 그대로 당신이 스스로 영원히 살 것이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예술가로서의 영원성, 언젠가 병석을 털고 일어나 뭔가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을 하려는 창작 의욕이 영원했다는 말로 나는 해석하고 싶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자존을 잃지 않고 죽는 모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죽음의 모습이다.
이렇게 죽기 어려운데 너희들은 어떡할래
요산 김정한 선생님은 일제시대에 붓을 꺾었던, 이 땅에서 진정으로 선생님으로 불릴 만한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이시다. 대학 동창인 은숙이는 그분의 막내딸인데,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던 모습을 회고하며 울다가 웃다가 했다. 평생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죽음에 임하시는 태도는 진짜 현자 같았다고 전해주었다.
당시 부산에 큰 성당이 세워졌고 첫 민선시장이 등장했는데, 시장은 부산의 첫 사회장을 김정한 선생님으로 하고 자신이 그 모든 행사를 주관하려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성당은 성당대로 첫 영결식을 김정한 선생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서울의 문단 등에서도 이 존경할 문인을 떠나보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좀체로 선생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병석에서 고통스런 몇 년을 보내셨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은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보내시며 이렇게 죽기가 어려운데 너희는 앞으로 어떻게 죽을 거냐고 자식을 측은한 눈빛으로 돌아보셨다 한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8남매가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하면 병실로 모여들고, 다시 ‘아 이번에도 아니구나’ 하고 헤쳐모여 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도 이렇게 병실로 모여들어 오랜만에 만난 형제자매들은 병상의 아버님 문안보다는 “야, 오랜만이다” “너, 신수 좋아졌다” “누구 대학 입시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안부를 물으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데 자는 듯 누워 계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입에 손을 대고 쉿! 하였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지금이 어떤 자리인데 너희가 이렇게 떠드느냐 하시며 혀를 쯧쯧 차시며 우선 아버지부터 돌아보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당시 대추차가 막 개발되기 시작했을 무렵인데, 어떻게 아셨는지 선생님은 대추차가 그렇게 좋다고 맛 좀 보자 하시며 대추차를 한 잔 청해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다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사람답게 살기도 힘들지만 사람답게 죽기도 어렵다. 고스란히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그 한계가 자존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죽음이다. (사진/ 한겨레) |
스님의 죽음 가운데는 일화들이 많은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숭산 스님의 마지막이다. 하버드대학 출신의 현각 스님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숭산 스님을 볼 때마다 저 동그스름하게 귀여운 노인이 무슨 카리스마로 서양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였나 항상 궁금했다. 그런데 돌아가실 때 마지막 말씀이 “나 누울란다”였다는 말을 듣고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원래 고승들은 ‘나 오늘 갈란다’ 식으로 자신이 떠나는 일시를 예언하기도 하고 앉아서 열반하는 것을 도가 많이 통한 스님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파서 정신이 없는 스님을 쿠션과 베개로 괴어놓고 앉아 계시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몇 날 몇 시에 돌아가실 날을 말씀했는데도 안 돌아가시면 시간 맞춰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고승의 반열에 확실하게 앉도록 한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아픈 사람이 앉아 있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아파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나 누울란다” 하셨다니 이 얼마나 고승다운 태도인가. 아니 사람다운 태도인가.
가족들을 위해 따로 돈을 마련해둔 언니
얼마 전에 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염하는 분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들었다. 가족도 없이 떠나시는 분이 유언장을 남겼는데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자신의 몸덩이를 마지막에 염해줄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돈을 남겼다는 것이다. 염생활 수십 년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눈물로 정성을 다해 뒷수습을 했다고 한다.
암으로 세상을 뜬 언니는 남편도 자식도 없었다. 고통의 기록들이 생생한 병상일지엔 형제자매들에게 섭섭했던 마음도 담겨 있었다. 유언과 함께 얼마의 돈을 따로 준비해두었다. 병 수발을 한 조카들과 형제자매들이 좋은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한잔씩 하며 자신을 보내달라고 했다. 언니를 보내고 온 우리는 모두 죄의식이 있었다. 누구도 언니를 책임지고 맡아서 간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자의 마음속에 가책이 많았고 네 탓 내 탓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날 언니가 준비해준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언니를 보낸 자리가 이상하게 가족의 화합 자리 비슷하게 되었다. 언니는 그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이 사람으로 살았던 모양 그대로, 사람다운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고 떠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의 위대함이 아닐까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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