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토지문화관에서의 내 인생 최초의 긴 방학생활을 누리며 깨달은 것들
평생 글로 남들에게 충고 비슷하게 했던 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네
▣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칼럼니스트
직장을 그만둔 지 꼭 1년이 되었다. 남들은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집에 있으면 우울증에 걸린다고 뭐든지 다른 일을 하라고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울할 틈이 없었다.
여행도 많이 했고 참으로 행복하고 한가하고 많은 일을 한 1년이었다.
거대한 ‘토목공사’를 마친 뒤…
지난해 12월30일에 책보따리를 싸서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것은 벼르고 별렀던 이빨 치료를 하는 일이었다. 1월3일에 치과에 갔더니 정말 커다란 토목공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임플란트 수술이라는 것인데 급하게 이를 심어야 할 네 개를 합쳐 총 열두 개를 해 박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틀니를 하려고 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의료기술의 발달로 얼마든지 자신의 치아와 꼭 같이 평생 잘 쓸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왜 불편하게 틀니를 하냐고 했다. 돈이 많이 드는 일 아니냐고 했더니 치아복은 오복 중 하나이고 그 오복을 돈을 들여 가질 수 있는데 왜 망설이냐며 진정으로 권유했다.
속는 셈치고 시작해 1년이 지난 지금 절반쯤의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얼추 오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서 기절할 정도로 메스껍고 힘들었던 기억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결심한 것이 있다. 결심이래봤자 특별한 것은 아니고 평소 소신대로 살자는 것이었다. 비록 비겁하게 살지언정 쪽팔리게는 살지 말자는 것이 내 인생의 좌우명이었다고나 할까. 젊은 시절에는 정의감에 입각한 용기, 그리고 용기에 기반한 행동이 내 인생의 목표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오류인지에 대한 회의가 들고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겁하게 침묵할지언정, 또 아무런 행동도 안 할지언정 낯뜨거운 일을 하지 말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지낸 세월을 돌아보니 직업인으로서 크게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 그렇게 긴장을 늦추지 말고 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었던 글쓰기였고 거기에서 놓여난 것이 기뻤지만 글을 안 쓰고 사는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것에 적응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한 1년쯤은 책만 열심히 읽고 여행을 다니자 했는데 불끈불끈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권고도 있고 해서 토지문화관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또 그렇게 미련이 있는 글쓰기를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하고 살 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토지문화관은 그야말로 모든 지원은 아끼지 않되 절대로 아무런 간섭도 안 하는 곳이었다.
△나는 혹시 아는 사람처럼 보이는 글을 써야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던 건 아닌가. 그제서야 공자님의 ‘즐기는 게 최고’라는 말씀이 다가왔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
나는 거기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긴 방학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아침에 등산, 낮에는 책을 보다 졸다가 밥 먹고 저녁에는 수영을 하고 밤에는 불빛 하나 없는 새카만 밖을 응시하며 이것저것 글도 조금씩 쓰고 했다. 토지문화관은 고시원과 수도원, 휴양지의 분위기가 묘하게 섞인 곳인데, 나는 휴양지 기분을 만끽하면서 몸을 단련하는 한편 수도원 비슷하게 나 자신을 알아보는 일에 몰두했다고나 할까.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며칠 지나지 않아 우연히 잡은 책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우화인데 첫 구절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아뿔싸! 그렇다면 내가 평생 글을 쓰면서 이렇고 저런 시시비비를 가리며 세상을 향해 충고 비슷하게 글을 쓴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었단 말인가 싶으니 글을 쓰느라고 밤을 새운 나날들이 허망해졌다. 대신 나 자신을 아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라는 유행가 가사가 탄식처럼 내 뒤통수를 쳤다. 토지문화관에서의 넉 달은 그렇게 지나갔다.
매사에 즐기는 법 배우는 중
토지문화관에 들어간 첫날 박경리 선생님이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뭐할라고 왔나 하셨다. 얼떨결에 곁에 앉은 박완서 선생님을 합쳐 두 분 소설가 앞에서 글 운운하거나 연만한 분들 앞에서 나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기가 외람되어서 나온 말이 40년 피우던 담배를 끊으러 왔습니다였다. 박경리 선생님은 싱긋이 웃으시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내밀며 담배 한 대 줄까 하셨다. 민망하여 손을 젓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그래 말난 김에 담배도 어디 끊어보자 싶었다. 돌아오는 날 구석구석에 담배 피우기 좋게 널어놓았던 20여 개의 라이터를 그곳의 일 도와주는 아저씨에게 주고 호기롭게 왔는데 일주일을 못 넘기고 아직까지 담배를 피우고 있다. 팔순의 박 선생님도 줄담배인데 내가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외람돼서라는 것이 담배를 못 끊은 나의 변명이다.
내가 새롭게 알게 된 나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가 철저하게 몸에 배어서 닥치는 대로 읽고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아는 것이 많아야 글도 잘 쓰는 것 같아서 글을 쓰기 위해 모든 것을 잘 알기를 열망하는 사람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는 글쓰기를 해야만 세상이 인정하고 영향력도 있는 글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자님이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다고 수천 년 전에 이미 말씀하셨다. 돌아보니 나는 거꾸로였던 것 같다. 즐기는 것은 죄악이고 가장 하급의 인간이 몰두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매사에 즐기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만약 내가 글쓰기를 진정으로 즐기는 경지에 이르면 나도 글쓰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요리하는 일은 한 번도 괴로웠던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고민 중에 있다. 공자님 말씀대로라면 나한테는 글쓰기가 하급의 작업이었고 요리가 상급의 작업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정도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지난 1년이 새삼 고맙고 소중하다.
'명품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년해로도 예술의 경지/ 한겨레21 (0) | 2007.01.02 |
---|---|
아버지와 용돈, 그리고 재떨이/한겨레21 (0) | 2007.01.02 |
사람모양 그래도 죽기 / 한겨레21 (0) | 2007.01.02 |
자발적인고 우아한 가난 /한겨레21 (0) | 2007.01.02 |
브레송 VS 카파 (0) | 2007.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