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한 사람과 살아가며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도 장난이 아니라네
▣ 김선주/ <한겨레> 전 논설주간 칼럼니스트
거의 조강지처 모드인 소설 쓰는 조선희가 말했다. 애인도 없고 스리섬은커녕 원 나잇 스탠드도 못 해보고 한 남자와 십몇년씩 사는 사람 주눅 들게 하는 세상이 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한 남자와 30년을 지루하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이혼할 조짐을 별로 보이지 않는 나에게 그는 그것도 괜찮은 인생 아니냐고 확인하고 다짐하고 싶어했다. 뒤를 봐도 앞을 봐도 이혼했거나 이혼을 결심한 사람 투성이고 선후배들이 연애담과 섹스 편력을 공공연하게 떠드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듣다가 이것이 대세인가 싶으면 어쩐지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0‘원 나잇 스탠드’가 더 행복할까
조선희는 그가 기자이던 시절, 그의 데스크로서 만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인생과 글쓰기의 데스크를 하는 일은 아주 즐겁다. 당시 그는 지금 남편이 된 아무개와 연애 중이었는데 내가 아주 쿨한 충고를 한답시고 “조선희야, 마음 가는 데 몸도 가야 하느니라”라고 격려 고무했을 때 “김 선배,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염려 마세요”라고 말해 나를 경악시키고 무안케 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거 참 세상에 적응이 안 된다고 하니 나는 얼마나 또 적응을 못하겠는가. 천하의 고수인 최보은이 최근 <한겨레21>에 연재되는 ‘김소희의 오마이 섹스’를 보고 거의 뒤집어져서 “이제 나의 시대는 갔도다”라고 항복했을 정도니까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아니 여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변해가는지 알 수 있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철벽 같은 종중 재산의 권리가 딸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여자들이 성담론의 중심에 턱하니 주도권을 잡고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십수년 전만 해도 후배들이 부부생활과 관련해서 속깊은 상담을 해오면 나는 이혼을 적극 권장했다. 말끝마다 친정 식구들의 과거를 들먹이거나 폭력을 휘두른다든가 성병을 두어번 옮겼다든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거 못된 놈이다, 저질이다, 무조건 이혼해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쳤는가 하면 더 바닥이 기다리고 있고, 어느새 상종가를 쳤는가 하면 더 높이 솟구쳐서 감동하게 하는 그런 폭과 깊이가, 한평생 한 사람과 살아가는 것에 있지 않겠는가. (사진/ 한겨레 이병학 기자) |
이혼이 돌림병처럼 번지고 있는 요즘의 내 대답은 무조건 참아라이다. 꺼진 불도 다시 봐라, 뿌린 씨를 거두어라, 집에 있는 물건을 재활용해봐라고 적극 말리는 중이다. 왜냐 하면 이혼을 해야겠다는 이유 가운데 대부분이 성생활과 관련된 불만이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을 되돌아보니 자신의 섹슈얼 라이프가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헛살았다, 어찌저찌 아이는 만들었지만 자신은 처녀나 마찬가지며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 결락된 삶을 살아왔다는 호소가 대부분이다.
여자들이 자신의 성적 취향과 욕망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여자들이 자신의 섹스 취향이 무엇인지 모르고 결혼을 했을 뿐 아니라 성적 환상도 남이 알세라 꽁꽁 숨겨두었다. 한 남자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지, 나도 그렇게 살듯 남도 그렇게 살겠지, 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비밀스런 성생활과 취향이 공개되고 자신의 것과 비교하게 되고 아니 딴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사는 거야 그런 거야에 이르면 그야말로 허망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 나잇 스탠드를 매일 되풀이하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도 아니고 무덤덤하고 지루해 보이는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이 더 불행한 것도 아니다. 부자가 더 행복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더 불행한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한 남자와 30년을 사는 나를 엽기적이라고 하는 후배들의 인생상담을 하기엔 자격미달이고, 그런 시추에이션에 내가 모르는 경지가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잘 아는 부자가 며느리를 보게 됐는데 첫째 조건은 부잣집 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은 그 다음에 고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 왜 또 돈 많은 며느리를 구하느냐 그랬더니 네가 돈맛을 아느냐였다. 죽여준다. 언젠가 국회의원을 한번 했던 친구가 다시 국회의원 하려고 발버둥을 쳐서 한번 해봤으면 됐지 왜 안달이냐고 했더니 “당신은 국회의원 못 해봐서 국회의원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 몰라” 해서 할 말을 잃은 적이 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돈도 있는 놈이 더 밝히고 권력도 그리고 아마도 섹스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남과 비교하여 사는 삶, 그것이 돈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섹스이든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주변에서 많은 인생을 지켜보며 터득한 인생의 진리다. 자기가 처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상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나만 헛살았다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상대도 헛산 것이 아니냐는 게 나의 충고다.
하룻밤 사랑으로는 알 수 없는 경지
오랜 결혼생활의 좋은 점은 한 사람을 깊고 넓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겨우 이 정도인가 절망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가라는 뜻하지 않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피차 마찬가지다. 한 사람과 오래 산다는 것의 진정한 장점은 서로 못 볼 꼴을 다 본 뒤에도 그래도 사랑이 남아 있다는 점일 게다. 사랑이 변화하고 진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근사한 점이 있다. 하룻밤 사랑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날의 화제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밥을 먹는 자리에 우연히 동석하게 된 소설 쓰는 유모씨가 (이름을 밝히면 나를 죽이려고 할 것 같으니까 공개는 못하겠다) 우리들이 원 나잇 스탠드가 어쩌고저쩌고했더니 “거기 어디야. 나도 한번 데려가줘” 했다. 우잇… 뭔 소리다냐 했더니 “그거 스탠드바 이름 아니야?” 했다. 원 나잇 스탠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이제 막 깨어나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저만 현란하게 앞서가는 여성들을 바라보며 이거 원 나는 헛살았구나 하는 것이 우리 시대 성담론의 현주소다.
조선희와 나는 어쨌든 의기투합했다. 백년해로도 예술의 경지 아니겠냐는 것이다. 한평생 한 사람과 살아가면서 상대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 바닥을 쳤는가 하면 더 바닥이 기다리고 있고, 어느새 상종가를 쳤는가 하면 더 높이 솟구쳐서 감동하게 하는 그런 폭과 깊이, 그것도 장난이 아니라는 점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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