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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의 산문

눈물의 기원

by eunic 2006. 10. 25.

MBC 베스트극장 『눈물의 기원』

2006년 4월 15일 방송 ∥ 극본․연출 김경희


'게 같은‘ 사람의 사랑은 여기까지이다.

겉으론 센 척하고 속은 무른 ’게 같은‘ 유부남과 처녀는 현실이라는 딱딱한 껍질 앞에서 사랑을 멈추었다.

영화잡지 편집장인 마흔의 석은 신입 사진기자로 들어온 은성이 참 예쁘다.

은성을 면접한 날 그녀가 간장게장을 먹으며 자신을 ‘게 같다’고 말한 씩씩함과 엉뚱함에 반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녀가 예쁜 사람인 걸 은성이 취재한 젊은 영화감독도 알아버렸다.

괜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석은 젊은 영화감독 얼굴이 실린 잡지 필름교정본에 점 하나를 찍지만

곧 후회하고 손으로 닦아내다 더 번지게 만들어버린다.

다행히 이 질투심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때까지 석은 좋아하는 마음이 이 정도에서 그치겠지 했다.

의도적이었는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1박2일로 부산 출장에 함께 가게 된 석과 은성.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은성의 손을 잡아버린 석은 좋아하는 마음을 들켜버린다.

그리고 은성 또한 자신이 석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다.

서울에 올라온 석은 은성을 찾아가

“미안해. 절대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 욕심내면 안 되겠지”라고

술기운을 빌어 고백한다. 그런 그를 은성은 말없이 등을 쓸어주며 위로한다.

은성의 나이, 스물아홉. 이제 사랑이 불장난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를 좋아하지만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걸 다 알게 된 스물아홉의 나이에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누를 수도 있게 된다.

석을 불러내 다시 간장게장을 마주하고 앉은 은성은 자신도 ‘게 같다’고 말한다.

겉으론 씩씩한 척 용감한 척 하는데, 속은 겁쟁이이라고 마음을 표현한다.

석의 나이 마흔.

내가 세상사에 안 흔들리는 게 아니라, 세상을 아무리 호려 볼래도 꿈쩍도 안 한다는 나이 불혹이다.

불혹에 찾아온 사랑의 감정은 순간 그를 강하게 흔들었지만 두 아이의 아빠고,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현실이 더 강하게 그를 붙잡는다.

석은 “수족관 물고기처럼 뛰쳐나갈 생각도 안 하게 되고,

좁고 답답한 것에 익숙해”진 자신을 알고 사랑을 단념한다.

둘의 사랑이 시작되지도 못하고 끝났지만 그리움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게 같은’ 그들은 그리움마저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결혼해서 배불뚝이 임산부가 된 은성은 석의 사진을 꺼내보며 그리움의 눈물을 토해내고,

석 또한 은성의 손을 처음 잡았던 바닷가에서 엉엉 소리내어 울며 감정을 정리한다.

<눈물의 기원>은 유부남과 처녀가 사랑에 빠질 뻔하다가

세상의 도덕과 자신의 위치를 너무 생각하느라 사랑을 멈춘 사람들을 예쁘게 그려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소심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는지는 그들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나이’에 대한 자각이 강하게 느껴진다. 나이가 주는 무게에 순응해온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내년이면 제 나이도 계란 한판이에요.”

“10대는 정상속도고, 20대는 두배, 30대는 세배의 속도로 세월이 흐른다던데.”

“나이 먹는 거 기쁠 것도 없고, 생일 같은 거 별루야”.라는 은성은

나이라는 숫자가 커지는 게 아니라 늙어지는 게 더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석도 마찬가지다. 석이 자신의 나이를 말하면서

“불혹, 내가 세상사에 안 흔들리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봐도 세상이 안 흔들리는 나이인 거 같애”라고 자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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