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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줄기세포의 상처와 수치심

by eunic 2006. 1. 5.

줄기세포의 상처와 수치심
야!한국사회



연말에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힘든 일을 겪는 여자친구를 지켜보았다.

그의 위장은 운동을 멈춰 음식을 넘기지 못했고, 뇌 전원은 여러 날 꺼지지 않았다.

내장 깊이 골수까지 상한 그가 걱정스러웠다.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보장된 것은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인 것처럼, 그가 상처받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친구의 주된 감정은 상처인 반면, 상대방(들)이 주장하는 괴로움은 수치심이었다.

둘 다 고통스럽지만, 상처와 수치심은 다르다.

상처는 자신과 만남에서 발생하지만,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서 비롯된다.

상처는 사유의 열매지만, 수치심은 명예 의식과 관련하여 발달된 감정이다.


이제 황우석의 ㅎ자만 나와도 멀미를 일으킨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에서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이 충분히 가시화, 언어화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성수대교 붕괴, 대통령 탄핵보다 충격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에 ‘황우석’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 가는 사건이다.

한국은 여전히 시민사회가 튼실하지 못하고, 중심 지향성이 진공청소기처럼 작동하는 권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건들은 곧바로 국가 프로젝트가 된다.

그래서 문제가 터졌다 하면 모든 사회적 모순이 일거에 폭발한다. 이 사태도 과학 기술과 정치, 윤리, 여성인권, 난치병 환자의 고통, 지구화, 자본, 애국주의, 언론, 정권안보, 학벌주의, 군사주의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어, 완전한 진상 규명은 불가능할 듯싶다.

나는 이 실마리 없는 복잡한 실타래에 대해, ‘논문’의 ‘공저자’인 당사자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자랑 아니면 수치스러워 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놀랍다.

몇년 전 전두환씨의 골목 성명을 연상케 하는 황씨의 기자회견은 그 절정이었다.

이런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닐 텐데, 대학의 연구 풍토와 정상화된 ‘커닝 문화’, ‘국익’이라는 이름의 파시즘에 대한 반성과 고백이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당사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겉치레 반성조차 없다(하긴, 누가 ‘당사자’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과 마주하는 고백을 통해야만, 자기 행위를 ‘죄’로 경험할 수 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성숙이다. 고백하기 전까지는 자기 잘못을 무의식에 저장할 수 있지만, 고백하면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수치심이 상처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때서야 죄책감은 체면이나 합리화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사회, 타인과 같은 외부와 닿았을 때 가장 아픈 곳, 그곳이 가장 정확한 나다.

성공 신화가 초래한 자기도취 앞에서는 자아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이 보는 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의 열망, 외로움, 공포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황우석’은 ‘강한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차라리 망상의 공동체라 부르고 싶다)가 만들어낸 욕망이다. ‘진실’은 가슴과 몸과 마음을 가장 난폭하게 훼손해야만, 우리 내부로 젖어드는 것. 상처받지 않고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국민’ 모두가 자신에 대한 의문을 포기하지 않는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지 않는 한, ‘황우석 사태’는 역사가 아니라 에피소드에 그칠 것이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면서, “그래도 브릭이 있었다”, “한국의 생명공학은 이미 세계 정상급이다”, “피디수첩이 대한민국의 명예를 살렸다”는 식의 위안은 희망이 아니라 국가주의라는, 이 사태를 일으킨 문제의 원인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한겨레 (http://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