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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씨네21] 치킨게임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by eunic 2006. 11. 6.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씨네21 2006-10-27 08:00] (글)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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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빈민가를 무대 삼은 영화 <시티 오브 갓>에서는 열살이 안 된 (남자)아이들도 총질을 해댄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아이에게 총을 겨누는 또래가 선심 쓰듯, “손을 쏠까, 발을 쏠까?” 묻는다. (원고 써서 먹고사는) 나 같으면 발을 쏘라고 할 텐데, 아이는 망설임없이 손을 내민다. 뛰고 도망치는 거리의 인생이니 손보다 발이 중요할 것이다. 상대방에게 의미있는 신체 부위에 대한 훼손은 효과적인 모욕이자 보복 수단이다. <타짜>의 도박사들은 손가락이 잘리고, <왕의 남자>에서 왕은 연적의 눈을 빼앗는다. 눈은 ‘보는 자’로서 남성 섹슈얼리티, 다시 말해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거세 공포의 변형으로 보았다. 근친상간으로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오이디푸스 왕은 자살한 왕비의 브로치로 자기 눈을 찔러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한다. 스스로 거세를 수행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입각한 남성 논리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해석은 오이디푸스 서사의 어머니 살해 동기를 은폐하고 있긴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의 군사주의와 남성 섹슈얼리티의 쌍생(雙生)을 폭로한다.
‘몸이 천냥이면 눈이 900냥.’ 이 말은 전통사회의 논리가 아니라 근대적 담론이다. 시각이 다른 감각보다 특권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개인(남성)이 인식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일이다. 사실 두뇌, 입, 손발은 모두 같은 몸인데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거나 조직에서 개인의 위치를 표현하는 ‘우두머리’, ‘수족’은 신체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어느 토론회에서 만난 공군 장교는 내게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미동맹의 본질을 “우리 군대는 눈없는 몸뚱이나 마찬가지죠. 까막눈이란 말입니다. 미국이 우리 눈이에요”라고 말했다. 군사작전과 관련한 모든 판단과 지시는 미국이 하고, 한국군은 그들의 수족에 불과하다고 분개했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전쟁은 백병전(白兵戰)이 아니라 정보전, 공중전이다. 백병(hand-to-hand)전은 말 그대로 몸으로 하는 육박전으로, 중세기까지 전쟁은 거의 백병전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무기가 인간의 몸을 ‘떠나’ 인간의 조종 대상이 되면서, 전쟁의 고통은 더욱 은폐되고 관념화되었다. 이제 전쟁은 근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첨단 무기들간의 경합을 뜻한다. 그로 인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은 군사 용어로 ‘부수적 피해’(콜래트럴 데미지)일 뿐이다.
주한미군 철수시 전투력 공백을 자력으로 메워야 한다는 자주국방론은 ‘불가능한 임무’다. 미·일동맹이든, 한·미동맹이든 지금 모든 동맹은 말이 동맹이지, 핵심 전력은 미국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방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군은 육군 중심이지만, 자국 영토가 아니라 전세계를 (침략)대상으로 하는 미국은 공군, 해군 중심이다. 주한미군의 핵 역시 공군이다. ‘적의 도발’을 감지할 수 있는 C4I(Command & Control, Communication, Computer and Intelligence), 즉 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정보 등 전장(戰場) 감시체제와 관련 기술력은 모두 미군이 장악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든 안 하든, 전시작전권이 이양되든 안 되든, 한·미동맹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 아래 지속된다. 현대전의 중추인 ‘두뇌와 신경에 해당하는’ 공중조기경보기, 에이왁스(AWACS) 같은 장비를 미국이 ‘전세계 평화를 위해’ 각국에 나눠줄 리 없다. 그렇다면 ‘협력적 자주국방’을 위해 우리도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갖춰야 할까? 한국 공군이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하여 지난해부터 배치한 미국산 전투기 F-15K 한대 값은 1천억원이고, 한국형 구축함 KDX-Ⅲ 한대 만드는 데는 1조500억원이 소요된다. 북한이든 주변 강대국이든 누군가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이는 물리력으로 격퇴되어야 한다는 힘의 논리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는 한, 돈 많이 들어가는 ‘자주’의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나 ‘적’이 아니라, 강자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만 살 수 있다는 상상된 신념 그 자체에 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치킨 게임
[씨네21 2006-07-28 08:00] (글)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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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걸프전.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딕 체니는 사우디 사막에서 폭탄 조립 부대와 인터뷰 도중, 이라크를 폭격할 2천파운드짜리 폭탄 위에 “사담에게, 감사하며(with appreciation). 딕 체니”라고 썼다(<뉴욕타임스>, 1991년 2월11일자). 전시에 개인의 몸은 국가를 대표한다. 운동경기도 국가 대항이면 선수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상징이 된다. 문제는 국민 중에서 누가 국가를 대표하는가이다. 답은 언제나 성인 남성(이성애자, 비장애인…)이다.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은 적국을 남성 단수인 “그”라고 부르곤 한다. 걸프전은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이 아니라 사담 후세인과 부시 대통령간의 개인적 싸움으로 묘사되곤 했는데, 체니의 낙서는 두 가지 의미로 정신분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후세인의 대결자, 다시 말해 미국 대표는 부시가 아니라 자기라는 보스(아버지) 살해의 욕망과 “사담, 네가 있어서(전쟁을 정당화하고, 무기를 팔아먹을 수 있으니) 고맙다”는 실제 감사의 남성 연대사다.

미국과 북한의 치킨 게임 앞에 선 남한의 ‘안전 보장을 위한’ 태도는 무관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북한은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7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자국을 겨냥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대포동 2호는 ‘애들 장난처럼’ 42초 만에 동해로 추락했다. 치킨(겁쟁이) 게임은 폭력(‘액션’)영화에 자주 나온다. 이 게임은 1950∼6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는데, 중앙에 선을 그려놓고 자동차 두대가 마주보고 달린다(<이유없는 반항>에서 가죽 점퍼에 오토바이를 탄 제임스 딘이 전형이다). 양 진영의 ‘두목’이 출전하고 ‘졸개들’은 숨죽이며 구경한다. ‘심장 약한’ 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모두 파국을 맞게 되는데, 충돌을 피하려고 먼저 핸들을 꺾는 ‘겁쟁이’가 지게 된다. ‘겁쟁이’는 목숨은 건지지만, ‘계집애’로 낙인찍힌다. 대개 치킨 게임은 벼랑 끝에서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관계에서 미련이 적은 쪽이 이긴다. 어떤 면에서는 힘의 원리가 지배적인(이라는) 국제사회에서 약자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다. 심리전에서는 약자도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번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지난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예치돼 있는 북한 자금을 동결하는 등 미국의 치명적인 경제 봉쇄나 전쟁 위협에 시달리는 북의 상황을 연민하고 안 하고는 사태 판단에 있어서 두 번째 문제다. 절대 약자 북한이 최강자 미국을 상대할 때 기댈 것은 남성성뿐이다. 그런데, 간단치가 않다. 이 게임은 담력이라는 남성다움을 겨루지만, 동시에 가부장제의 기본 구조인 남성동성성(homosocial), 즉 남성의 남성에 대한 에로틱한 짝사랑 전술이다. 미국의 입장은 북한에 대한 일관된 적대적 무시다. 6자 회담을 통해 북과는 직접 협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북한이 눈길 끌기 작전을 펴도, 북의 치킨 게임에 면역된 미국에 미사일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힘의 논리는 강자를 위한 게임의 법칙이다. 북한의 착각은, 힘없는 자가 힘의 논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있다. 게다가 그 인식론적 근거는 남한, 중국 같은 주변국과는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미국만이 자기 파트너라는, ‘주체사상’에 어울리지 않은 식민성이다. 북한은 ‘미제’와 대결하려는 죽음을 무릅쓴 용맹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강자에 대한 일방적 구애와 인정 욕구에 다름 아니다.

권력과 폭력은 사랑처럼 경험하기는 쉽지만 정의하기는 어렵다. ‘악의 축’은 미국인가, 북한인가. 아니면, 계급이 다를 뿐 같은 깡패인가. 미사일 소식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을 향해 자살 폭탄 테러에 뛰어든 팔레스타인 남성의 이야기, <천국을 향하여>(Paradise Now)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폭탄을 몸에 장착한 남성과 이를 만류하는 여성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통해, 폭력과 평화가 얼마나 성별화된 제도인지 보여준다(한글 제목 “천국을 향하여”는 “천국은 여기”라는 영화 주제와는 정반대로, 오역이다).
“대화 상대가 되어줄게.”
“말로 해방이 돼?”
“우리(팔레스타인) 군사력이 열세라는 걸 인정하면서 그냥 살면 안 돼?”
“(이스라엘과) 평등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평등하게 죽는 것은 가능하지.”

남성성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불가피하다. 공도동망(共倒同亡). 같이 죽어 평등해지겠다는 ‘용감한 죽음’의 정치학은, 바로 미국이 원하는 바다. 자신을 파괴시키는 저항은 ‘강한 남자’의 전술이 아니라 약자의 선택일 뿐이다. 강자는 약자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다(이 글은 <한겨레> 박민희 기자와의 대화에서 도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