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 정희진 칼럼
여성의 몸 그리고 명칭
글 정희진 서강대 강사. 여성학자
남자는 씨, 여자는 밭?
‘여자는 밭, 남자는 씨’라는 말은 참 이상하다. 여성의 난자(卵子)도 독립된 세포로서, 하나의 ‘씨’가 아닌가? 명백한 과학적 사실 위반이다. ‘남자만 씨’라는 주장은, 남성만이 인간 형성의 기원이고, 인류(‘man’kind)를 대표하며, 생산의 주체라는 것을 은유한다. 이 이야기에서 ‘밭’은 별 의미가 없다. ‘밭’은 배추든 오이든 뿌려진 씨가 무엇인가에 따라 배추밭이 되고, 고추밭이 되는 등 ‘씨’에 의해서만 존재의 의미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씨는 싹이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등 변태(變態)를 거듭하지만 여성이나 어머니를 상징하는 ‘밭’의 성격은 변화하지 않는 정박성(碇泊性)을 띤다. ‘씨’는 남성의 이동성, 자아실현, 자유, 창조성을 상징하지만 여성은 단지 ‘씨를 받는 그릇’이라는 것이다.
심수봉이 불러 인기를 모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 가사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돌아다니고, 여성은 고향에 머문 채 남성을 기다린다. 망부석(望夫石)이라는 말은 있지만, 망부석(望婦石)은 없다. 여성은 ‘고향’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남성보다 향수병에 덜 걸린다. 여성은 향수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이지, 향수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성별 능력 차이가 크게 발견되는 분야는 기하 즉 공간 지각력인데, 이는 여성들이 어릴 적부터 수동적으로 사회화된 탓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성 사회가 여성에게 하이힐이나 중국의 전족(foot binding) 같은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도, 여성의 이동성에 대한 제재와 관련이 있다. 시간 중심적 사유와 공간 중심적 사고의 대립은 그 자체가 서구 문명사일 정
도로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는데, 이는 성별화(性別化)된다. 다시 말해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남성은 시간을, 여성은 공간을 상징한다. 남성은 공간을 지배하는 주체이고 여성은 남성 주체가 힘을 가하거나 쟁탈전을 벌이는 대상, 공간으로 여겨진다.원시림이 ‘처녀림’, ‘처녀지’ 등으로 불리는 것은, 정복의 대상이 되는 공간이 여성화된 명칭을 갖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역사에서 여성은 남성들의 개척 대상인 자연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 신대륙을 발견한 유럽 남성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America) 대륙은, 아메리고의 여성형 명칭이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버지니아(Virginia), 캐롤라이나(Carolina), 조지아(Georgia) 등 ‘지리상의 발견’ 대상이 된 북미 대륙의 주(州) 명칭들은 모두 ‘-ia’로 끝나는 여성형 명사들이다. 한국사회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많다. 1983년에 설립된 정부 기관인 한국여성‘개발’원이나 1995년의 여성‘발전’기본법 등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한국여성개발원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양성 평등’이 명칭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양성 평등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낀 남성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현재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은 남성과 절대로 같을 수 없는, 개발되어야 할 대상(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 명명되어왔기 때문에, 여성의 많은 신체 기관들이 공간 명칭을 갖고 있다. 남아가 사는 곳인 ‘자궁(子宮),’ 아내를 일컫는 ‘집’사람, 여성의 질을 뜻하는 버자이너(vagina)…. 버자이너는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칼’이 머문다는 의미에서 ‘칼집’이라는 뜻이다. 한자 ‘질(膣)’도 방이라는 의미의 실(室)자를 포함하고 있다. 남성은 총각 딱지를 ‘떼는 데’ 비해, 여성은 처녀막을 ‘지킨다’. 처녀막은 생물학적으로도 틀린 말이다. ‘막(膜)’이라는 말은 마치 무슨 커튼 같은 것이 있어서, 물체가 통과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사람들마다 이 부분의 모양은 다양하다. 처녀막의 올바른 명칭은 ‘질주름’이다.
서양 중세 봉건시대 영주는 농노의 아내에 대해 신혼 초야권(初夜權)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여성의 질이 이빨이 되어 남성의 성기를 잘라버릴지도 모른다는 삽입 섹스에 대한 공포 문화 때문이었다. 여자랑 자는 것은 위험하므로 영주가 먼저 실험해본다는 논리인데, 이러한 신화도 여성의 질을 무서운 공간으로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성교를 의미하는 ‘삽입(intercourse)’이라는 말 역시, 여성을 ‘들어가는’ 영토로 전제하는 논리다. 여성 비하적 언어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는, ‘아줌마’라는 말은 여성을 ‘아기 주머니’로 보아 생긴 말이다. 아줌마는 ‘아기 주머니’ → ‘아주머니’ → ‘아줌마’의 유래를 갖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가부장제 사회의 월경 금기나 혐오도 자궁에 대한 공간적 비유로 인한 것이라고 본다. 월경에 대한 혐오는 임신의 실패이기 때문인데, 임신의 실패는 여성이 남성의 정자를 성숙시키는 안전하고 따뜻한 자궁을 제공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된다. 수정(受精)이 ‘공을 바구니에 넣는 것’ 혹은 정자가 여성의 질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으로 의미화 되기 때문에 월경 혐오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흑인 여성, 나이든 여성, 장애 여성, ‘뚱뚱한’ 여성들은 규범적(백인, 중산층, 젊고 예쁜…) 여성과 달리 강간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 역시, 강간을 정숙한, 절제된, 깨끗한 개인적 공간을 침범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임신한(pregnant)’이라는 영어 단어는, ‘정복할 수 있는(pregnable),’ ‘정복할 수 없는(impregnable)’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여성의 몸이 남성 세력들 간의 전장(주로 성폭력을 통해)이 된다는 것이다. 구한말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간의 싸움이었지만, 전쟁 당사자들의 영토가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약자의 몸/공간이 강자의 경합 대상과 전쟁터가 될 때는, 누가 그 공간을 획득하는가, 누가 그 공간을 채우는가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달라진다. 앞서 언급한, 정자가 모든 유전 물질을 나른다고 보는 ‘남자는 씨, 여자는 밭’처럼 여성의 몸을 공간화하는 개념은, 성폭력의 발생 논리 중의 하나다. ‘여성은 밭이기 때문’에, 전쟁 시기의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과 강제 임신은 ‘인종 정화(淨化)’로 합리화된다. 그래서 대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occupation of the womb)’을 의미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 공동체의 재생산을 위한 ‘최후의 재산’으로 간주된다. 여성의 몸이 여성의 것이 아니라 남성 공동체의 소유물로 여겨지므로 집단 강간은 남성들 간의 소유권 분쟁, 재산 탈취 행위로 간주된다. ‘어떤 남성과 섹스 하느냐(어떤 씨가 뿌려졌느냐)’에 따라 여성의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의 몸은 전쟁 시 ‘전리품’으로 여겨진다. 탈취 대상으로서의 공간이 성별화될 때, 집단 간 전쟁은 전시 피점령지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영토뿐만 아니라 남성이 상징하고 구현하는 문화 생산 과정은 모두 성별화 된 행위로서, 여성의 몸을 매개하여 진행된다.
‘예를 들어, 남성은 구남성, 신남성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여성은 구식 여성, 신여성으로 구분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근대와 진보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남성은 양복을 여성은 한복을 입는다거나, 은행 같은 사무실에서 남성은 사복을 입는데 반해 여성은 유니폼을 입는 것도 같은 경우다. 여성이 남성 공동체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남성 공동체의 번영과 몰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다. 마치, 민족의 전통을 외치는 사람은 남성이지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 제사 음식을 준비하거나 김치를 담아야 하는 사람은 여성인 것처럼.
정희진| 여성주의적 글쓰기를 중요한 사회적 실천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성주의의 필요성과 이를 통해 나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관한 책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사회 일상의 성 정치학』을 최근 펴냈으며, 이외에도 여성학에 관련된 여러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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