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라잡이]남자들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 |
[한겨레]2003-02-03 01판 10면 1875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
설날이면 어른들을 모신 집집마다 친가 쪽 손님들이 모여든다.(외가 쪽 손님들은 못 온다.)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손님들이 현관을 통과하는 순간,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남자와 여자가 깔끔하게 나누어진다. 남자들은 뭔가 중요하게 논의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안방 또는 거실로 향하고, 여자들은 또한 너무나 당연하게 부엌으로 방향을 잡는다.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안방에 들어간 남자들이 뭘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모두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먼산을 바라보거나 애꿎은 텔레비전 리모컨만 괴롭히고 있다. 안방으로 향하던 당당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이 보여주는 초라한 침묵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이 이야깃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기껏 찾아내는 소재는 그저 정치권과 관련된 낙수(穗)들뿐이다. 예전에는 주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를 씹으며 시간을 죽였지만, 이번 설날의 안줏거리는 단연 노무현 당선자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다. 애들이 잘 크는지,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에 대한 속 깊은 대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이들이 한때 형제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프로야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설날에는 그것도 없다. 끔찍한 광경이다. 같은 시간, 부엌에 자리잡은 여자들은 사실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남남들인데도 활발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애들 자랑, 남편 흉보기에서부터 시작해 고부간의 갈등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제들이 부침개와 함께 익어간다. 모두들 몸은 피곤한 상태지만 그래도 부엌에는 안방에 없는 생동감이 있다.(물론 모든 집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음식 준비하는 데 두어시간이 걸리고 안방의 풍경이 심심함을 넘어 살벌함에 이르게 될 때쯤 여자들이 음식을 들고 구원에 나선다. 상이 차려진 뒤, 사이사이에 여자들이 끼어 앉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화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정말 끔찍한 것은 식탁에서조차 남녀가 갈라 앉는 경우다. 이 정도 분위기가 되면 거의 구제불능이라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친척집에 갈 때마다 이런 이상한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분명히 남자였지만, 안방 쪽을 피해 죽어라 부엌 근처만 얼쩡거렸다. 아마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어떤 본능이 안방에는 ‘생명’이 없음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해도, 현관 입구에서부터 홍해가 갈라지듯 남녀가 나눠지는 기본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명절은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시간이며, 산 자보다는 죽은 자를 위한 축제다. 늘 명절 끝난 뒤 여자들의 후유증이 이야기되지만, 남자들이라고 해서 음식을 받아먹는 마음이 한없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어른들 눈치가 보여서, 전통을 깰 수가 없어서, 유난스럽게 보일 수가 없어서, 그 부자연스러움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며느리와 딸 동시존재 금지의 원칙’까지 깨어지게 되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출가한 딸과 며느리는 논리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출가한 딸이 집에 와 있다는 것은 곧 며느리도 자기 집을 찾아가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고 한없이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 때문에 때로 이 원칙의 고귀함을 잊어버리는 분들도 생긴다. 이때부터는 거의 재난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나 신나고 흥겨운 명절을 즐기게 될 수 있을까. 남자들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그림 아래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다. 명절 때 절대로 함께 존재해서 안 되는 것이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라면, 명절 때 되도록 함께 일하고 즐겨야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다. 함께 음식을 하고, 함께 설거지를 하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함께 게임을 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추석을 기다려 본다. 우리 남자들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 김두식 변호사·한동대 법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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