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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길라잡이]토론이 숨쉬게 하라

by eunic 2005. 12. 26.
[길라잡이]토론이 숨쉬게 하라
[한겨레]2003-01-06 01판 09면 1905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군법무관을 마치고 잠시 검찰청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검사장이 며칠 뒤 우리 지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업무보고를 받은 뒤 검사들과 점심을 함께 들 예정이라고 했다. 아울러 “사장님(검사장을 보통 이렇게 불렀다)이 질문할 것을 적어 내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무슨 질문요?” 나의 물음에 선배가 웃으며 대답했다. “식사할 때 썰렁하잖아? 그러니까 높은 양반이 우리한테 물어볼 만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는 거야. 김 검사는 아직 젊으니까 좀 싱싱한 내용을 적어 내도록 해봐.”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싱싱한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아무 것도 적어 내지 못했다. 덕분에 총무를 맡은 동기 검사만 질문을 만들어내느라 애꿎은 고생을 했다.드디어 ‘사장님’이 우리 ‘회사’를 방문하는 날 점심시간. 중앙에 앉은 검사장은 식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흘끔흘끔 보아가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최 검사는 초임인데도 인지수사를 통해 벌써 여러 명을 구속했구먼. 그래 여자로서 일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질문을 받은 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검사 업무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럭저럭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검사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다고 했지? 그래 수험생 부모가 되어 보니 어떻던가?” 같은 개인적인 질문과 대답도 오갔다.

검사장의 따뜻한 질문과 검사들의 모범답안이 오가는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응답자가 동시에 출제자이기도 했으므로 틀린 대답이 나오거나 분위기가 깨질 염려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광경’을 지켜보는 내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검사장은 젊은 검사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누구 자식이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나 초임 검사가 인지한 사건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식사는 아마추어 감독이 찍어내는 삼류영화처럼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이 삼류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이 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들을 나온 모범생들이었고, 사장님은 이 업계에서 손꼽히게 성공하여 조직의 총수도 꿈꿀 만한 인물이었다. 기자나 다른 손님도 없고 기껏 30명 가까운 내부 조직원들만 모여 있던, 따라서 이른바 ‘말씀 자료’의 필요성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비공식적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말씀 자료는 시간이 부족한 높은 분들에게 충분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다. 이 땅의 남성 지도자들 대부분이 자연스러운 대화와 일찍부터 담쌓은 분들임을 생각할 때, 그 썰렁할 분위기를 깰 수 있는 방법이 말씀 자료와 폭탄주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 자료는 생명력을 포기한 대가로 안정을 취득한 것에 불과하다. 말씀자료만 보고 이야기하는 ‘안정된’ 분위기에서 건강한 창조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지난해 상반기 민주당 국민경선 이후 일부 신문들이 지속적으로 생산해온 노무현 당선자의 이미지는 거의 ‘개념 없는 또라이’에 가까웠다. 거두절미가 주특기인 언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날로 우스운 사람이 되어가던 그가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언어 속에서 생명력을 발견한 젊은이들이 ‘노무현 일병 구하기’에 나선 덕분이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말씀 자료와 보도 자료에 길들여진 ‘모범생’ 기자들이나 대학교수들의 눈에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여전히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증거’로 보일 것이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기사와 칼럼 행간에 ‘불안한’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노 당선자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신중하되 생명력을 잃지 말 것.’ 커다란 책상에 앉아 부동자세의 장관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분위기에서 개혁의 나무는 숨을 쉴 수 없다. 안정이란 이름 아래 생명력 포기를 요구하는 세력 앞에 굴복하지 말라. 어떤 말씀 자료도 살아있는 토론을 대체할 수는 없다.

김두식 변호사·한동대 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