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라잡이]장상씨와 김석수씨의 차이 |
[한겨레]2002-10-14 01판 09면 1921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
한 2년 동안 집안일을 전담한 적이 있었다. 아내는 미국 정부에서 돈을 받아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중이었고 딸아이를 돌봐줄 마땅한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내 쪽에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총명한 며느리와 좀 덜 떨어진 아들 사이에서 주저없이 며느리를 밀기로 작정하신 부모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은 대학도시에 머물며 아이 보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틈틈이 다양한 책들을 빌려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젊은 남자로서 흔치 않은 복을 누린 셈이다.집안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아내가 출근한 뒤 혼자 설거지를 하는 동안, 수챗구멍에 남겨진 미끈미끈한 음식찌꺼기들을 손으로 닦아내며 ‘내가 여자 잘못 만나서 무슨 고생인가’ 회의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잠깐의 휴식을 용납하지 않는 아이에게 엉뚱한 화풀이를 하고 나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의 인격적 한계 앞에 절망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그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월급받는 직장생활로 영원히 복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그 2년간, ‘아기를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분유광고 속의 여인’이 완전한 허구이며, 남성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여성들도 똑같이 하기 싫어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집안일만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우울해질 수 있고, 그 우울은 배우자의 사랑만으로 치유될 수 없음도 배웠다. 입만 벌리면 군대 얘기, 정치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는 유학생 아저씨들의 과장된 거대담론 대신, 가까운 이웃의 아픔에 관심을 갖는 아줌마들의 대화에서 편안함을 느끼게도 되었다. 동네 유학생 부인 아줌마들과 계를 짜서 주말마다 돌아가며 아이들을 보기로 한 다음, 갑자기 찾아든 토요일 오후의 자유 앞에 뜨거운 연대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참으로 운 좋게도 공부할 기회를 잡았고, 공부를 마친 뒤 한국 사회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나는 더 이상 남성 기득권의 수혜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귀국해서 대학에 자리잡은 이후, 지인들과 만나면 언제나 나의 ‘기이한 행동’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내에게 “좋은 남편 만나서 행복하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때마다 내 어깨가 으쓱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결국 이것도 내가 누리는 기득권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성이 직장을 그만 두고 가사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가사노동에서 벗어난 이후 2년 반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혼자 미국에 남아 일하고 공부하며 아이까지 키워낸 아내의 노고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밤중에 잠든 아이를 둘러업고 연구실을 오가느라 허리가 휜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편 잘 만난 여자’에 불과할 뿐이다. 명절 때 잠깐씩 부엌 근처에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나는 천하에 없는 좋은 남편이 된다. 명절 내내 부엌을 지키는 어머니와 아내의 노동은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짧은 기간의 가사노동 경험만 갖고 내가 더 이상 기득권 세력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착각이었다. 이 땅에서 ‘고추’를 달고 태어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다. 장상씨가 찬성 100표, 반대 142표로 총리 인준 획득에 실패한 데 반해, 김석수씨는 찬성 210표, 반대 31표로 ‘무사히’ 총리 업무를 시작했다. 장상씨에게 반대표를 던졌던 많은 의원들이 김석수씨에게는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두사람 사이에 별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나는 그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장상씨에게 없던 그 무엇이 김석수씨에게 있었기에 당신들이 그렇게 마음을 바꾼 거요? 건국 이래 여성 총리 한명 없는 이 나라에서, 오늘도 나는 내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김두식 변호사·한동대 법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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