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품관

[심야통신]베트남전쟁은 끝났는가

by eunic 2005. 12. 23.
[심야통신]베트남전쟁은 끝났는가
[한겨레]2005-12-02 01판 M07면 2925자

“한국군은 반공의식에 불타 진심으로 싸우고 진심으로 죽였다”

낡은책속 증언과 베트남농민의 싸늘한 시선… 가슴속 통증이 도졌다

그들이 한국에 사죄를 요구한다면 / 일본의 과오를 뒤따를 것인가?

인생에는 지나갔나보다 했지만 생각지도 않게 되살아나 마음 착잡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올해는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기념할 만한 해였지만, 동시에 베트남전쟁 종전 30주년이기도 했다. 재일 조선인인 내게 베트남전쟁의 기억은 오직 6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던 반전운동의 기억과 연결돼 있으나 한국의 동포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내 세대의 한국 동포들에겐 병사로서 직접 전투를 경험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지금 전쟁의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일반인들은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궁금하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최근 필요가 있어 베트남전쟁과 관련한 낡은 책을 몇 권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1965년에 한-일 조약(한-일 수교협정)이 체결됐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 조약 최대의 문제점은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을 모호하게 한 것이었다. 또 재일 조선인 가운데 ‘한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만 ‘협정 영주권’을 주도록 한 처리방식 때문에 재일 조선인 사회를 무자비하게 분단시켰다.

식민지배 피해자인 재일 조선인이 두번째의 피해를 본 것이다. 이 시기에 조약이 체결된 것은 한·일 양국에 대해 미국이 강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한·일 양국을 묶는 동맹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자금을 일본에 떠맡기면서 동시에 한국한테는 베트남에 파병토록 해 “아시아인 동지를 싸우게 만드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병사의 급여는 미국이 지급했고 그들이 가족에게 보낸 돈이 한국의 어려운 외환사정을 호전시켰다. 베트남전쟁에 따른 군복, 군화, 화학조미료, 즉석 라면 등의 수출증대가 한국 경제성장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교도통신〉 사이공 특파원이었던 가메야마 아사히의 〈베트남전쟁〉(1972. 이와나미 신서)이라는 작은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한국군의 전투는 베트남인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했다. 한국군은 해방전선(베트콩) 지배하의 마을을 공격하면 주민도 모조리 죽인다든가, 처녀들을 모두 폭행한다든가, 한국군 특유의 매복공격으로 억울한 주민 다수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거의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 한국군 ㅁ 참모는 “놈들 마을을 공격할 때 발포해 오면 그 마을을 괴멸시키는 것이 게릴라전의 기본이다”고 말했다.

ㅁ 참모는 해방전선을 항상 일본어로 ‘야쓰라’(놈들)라고 불렀다. … 한국군 장교들은, 조선전쟁(한국전쟁)을 체험한 한국인은 베트남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미군과는 달리 베트남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 반대였다. 같은 아시아인이고 같은 종교를 갖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남북으로 분단돼 동족상잔의 비극과 고통을 모를 리 없는 한국이 왜 군대를 보내 베트남인을 죽이는가.

이것이 베트남인의 심정이다. …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군 병사들에게 훈장을 주는 행사에 동원된 학동들이 국기를 흔들면서 “따이한(대한), 따이한!” 하고 외치고 있었다. 땀과 먼지투성이의 한국군 장교를 전우가 맞이한다.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껴안는다. 그 감동적인 장면 중에 학동들 뒤에서 병사들을 응시하고 있는 농민들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 농민들만큼 얼어붙는듯한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 베트남에 파병된 타이나 필리핀 군대는 요란한 전과를 올린 적이 없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병사들에게, 헛되이 피를 흘리지 마라, 무사히 귀국하길 바란다고 연설했다. 반면에 한국군은 반공의식에 불타 진심으로 싸우고 진심으로 죽였다. 그것이야말로 비극이었다.”


대학생 시절에 읽고 농민들의 얼어붙을 듯한 시선을 내가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30년 만에 다시 읽자니 착잡한 아픔이 되살아났다. 베트남 농민이나 그 자손들은 지금은 이미 전쟁의 기억을 잃어버렸을까. 그럴 리가 없다.

가메야마는 일제 때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 특파원 경험도 갖고 있는 베테랑 저널리스트다. 그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비판하고 일본이 조선전쟁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돈을 번 사실도 비판했다.

그의 한국군 비판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일본이라는 ‘안전지대’에 몸을 두고 있는 처지에서 무책임하게 조국의 동포를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니다.

적지 않은 재일 조선인이 식민지배의 상흔처럼 일본 사회에 남겨져 거기에서 어쩔 수 없이 고단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일본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조선민족’의 일원이기를 고수하고 있다.

그것은 침략하고 지배한 쪽의 부정의를 용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지배당한 쪽이 지닌 도의성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도의성’이야말로 우리들이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90년대에 들어 ‘위안부 할머니’를 비롯한 한국의 피해자들이 속속 자신들을 드러냈을 때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낭패했고, 책임을 부인했으며, 나르시시스틱(자아도취적)하게 자국을 찬미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런 일본의 자세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 일반민중이 한국군의 전쟁책임을 문제로 삼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들었으나 그것은 그들이 너무 오래 끈 전쟁과 그 뒤의 사회적 혼란 때문에 나날의 생활에 쫓기는 탓일 것이다.

장차 언젠가 베트남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경제가 안정되면 피해자들이 나타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 한국의 동포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일본이 저지른 과오를 뒤따라가지 말기 바란다.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은 바로 스스로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