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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자기성찰의 도시 베를린

by eunic 2005. 12. 23.
[심야통신]자기성찰의 도시 베를린
[한겨레]2005-11-18 01판 M07면 2843자

독일 식민지주의 기억 되짚는

베를린 문화행사를 둘러봤다

역사 극복은 ‘미래지향’ 따위

미사여구로 이뤄지지 않는구나 절감

그들의 성숙한 문화 엿보며

이곳이 도쿄라면…

심야통신/베를린의 가을


나는 지금 베를린에 와 있다. 이번에는 1주일 정도의 짧은 체류지만 이 도시에서는 항상 내 흥미를 자극해 마지않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기에 더욱 바빠진다.

베를린 독일오페라 극장에서 쿠르트 바일의 〈마하고니 시의 흥륭과 몰락(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을 봤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원작은 폭력, 도박, 매춘 등 온갖 악덕이 판치는 공상의 도시 마하고니를 무대로 자본주의 사회와 인간의 욕망을 철저히 풍자하는 작품이지만, 관객 중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나 고교생 단체관객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교훈 냄새를 풍기는 피상적인 미담만을 보여주려는 경향이 강해, 젊은층이 이런 자극적인 작품을 어른과 함께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른 자신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몇개의 미술전람회를 봤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윌리엄 켄트리지의 〈블랙 박스〉였다.

켄트리지는 1989년 이래 특유의 모노크롬 드로잉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제작해온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티스트인데, 그 지속적인 주제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분리정책)와 그 이후의 시대가 인간에게 준 트라우마(심리적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옛 독일령이었던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에 대한 독일 식민지주의의 기억을 다뤘다.

동서독 통일을 실현하고 유럽연합(EU)의 중심에서 발전을 구가하는 현재의 독일, 그 번영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 베를린 중심가 운터 덴 린덴에 있는 미술관에서 바로 〈블랙 박스〉에 담겨 있는 식민지주의의 악몽을 되살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자인 켄트리지가 남아프리카 출신의 백인이라는 점이다.

즉 그는 말하자면 식민지주의의 가해자이자 수익자였던 쪽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식민지주의 역사의 진정한 극복은 ‘미래지향’ 따위의 역사의식이 결여된 미사여구를 통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며, 특히 가해자 쪽에서 고통이 따르는 사상적 실천을 감당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작자 켄트리지도, 그 전시를 베를린 중심에서 실현한 기획자도, 전시를 진지하게 관람한 관객들도 성숙한 문화의 담당자들이다.

과연 일본에서 이처럼 자국의 식민지주의 기억을 다루는 일본인 아티스트가 존재할까?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전시가 도쿄 중심가에서 대대적으로 열릴 수 있을까? 또 거기에 많은 관객들이 몰려가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기성찰을 할 수 없는 아이가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부시 정권의 미국이 그러한데, 일본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 베를린에서 오래 살아온 윤이상 선생 타계 10돌 기념 콘서트에 가는 것도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윤 선생의 자서전 〈상처입은 용〉은 나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명저의 하나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에 그 일본어판 출판기념회가 도쿄에서 열렸을 때 나는 윤 선생을 처음 만나뵈었다.

1984년에 일본 군마현에서 열린 구사쓰 국제음악아카데미에 윤 선생이 초빙됐을 때 나는 선생의 숙소까지 만나뵈러 간 적이 있다. 당시 내 형 두 사람이 조국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나는 아직 나이 갓 30대에 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젊은이였다.

나는 윤 선생한테서 뭔가 구체적인 격려나 위로를 받고 싶었으나 선생은 내 이야기에 지그시 귀를 기울여주었을 뿐 거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호텔 방에 오선지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뿐이다.

선생은 이미 현대음악계에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또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매우 바쁜 몸이기도 했으나 촌각을 아껴가며 교향곡 대작 작곡에 몰두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더 높은 것을 찾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추구해가는 그 모습을 봤을 때, 선생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지만 나 자신도 그처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1995년 11월2일 나는 베를린에 갔다. 미리 연락을 해서 윤 선생과 인터뷰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작가가 되기로 작심한 나는 〈상처받은 용〉의 속편이 될 선생의 전기를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착 뒤 선생의 자택에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음날은 날씨가 추워져 오후가 되자 때이른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바로 그 시간에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쏟아지는 눈은 하늘로 오르기 위해 용틀임하는 용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비늘이었을까.

그때로부터 또 10년이 지났다. 그날과 달리 올해의 베를린은 따뜻했다. 사흘간 이어진 기념 콘서트에서는 수준 높은 연주가 진행됐다. 특히 11월4일의 〈밤이여 나눠라〉는 긴장감이 가득 찬 최고의 연주였다. 그러나 관객은 많지 않았고 서글프게도 한국인의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콘서트는 베를린 국제 윤이상협회의 비상한 노력 덕에 실현됐다. 윤 선생과 친교가 있던 저명한 연주자들은 무료로 출연했다고 들었다. 윤이상의 망명지 독일에서 선의의 독일인들이 중심이 돼 윤이상 예술의 높은 가치를 유지하고 넓히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정적인 곤란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한국 내에서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윤이상을 이제는 마치 ‘국민적 예술가’처럼 사람들은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예술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한국 사회의 문화적인 성숙도가 어느 정도일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