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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망령이라도 되어 싸우리라

by eunic 2005. 12. 23.

[심야통신]망령이라도 되어 싸우리라

공생은 가능한가?-〈루트 181〉(속)

[한겨레]2005-11-04 01판 M07면 2977자

‘루트 181’ 영화가 일본서 다큐상을 받았다

아랍인 감독과 10년만의 해후

“공생은 가능한가?” 재일조선인 질문에

유대인 감독 시반이 대신 답했다

가해자 양심이 움직여야 한다고

일본인 학생 200명이 들었다, 다행이다

미셸 클레이피, 에이알 시반 두 감독의 〈루트 181〉은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것을 진심으로 반기면서 동시에 내게 이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마찬가지로 분단과 이산을 경험해온 우리들에게 이 작품에 버금가는 수준의 질 높은 다큐멘터리 작품이 과연 있는 걸까. 유감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앞의 글에서도 썼듯이 나는 클레이피와는 10년 전에 한번 도쿄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헝가리인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베라 타르와 그 두 사람을 제주도 출신 동포가 경영하는 자그마한 야키니쿠(불고기)집으로 안내했다. 한국음식이 입에 맞았던지 그들은 매우 흡족해했다.

나의 우인인 가게 주인도 우리 이야기에 끼어들어 4·3사건을 경험한 자기 친척 얘기며 오사카에서 차별받아가며 가난하게 자란 자신의 얘기를 먼 데서 온 손님 두 사람에게 털어놨다. 가게 안주인(우인의 처)은 제주도에서 밀항해온, 이른바 ‘불법체류자’였다. 두 사람은 일본사회의 몰이해 속에 서로 기대듯 다독거려가며 이 자그마한 가게를 꾸려온 것이다. 다행히 부인은 쾌활한 성품에 요리에도 재능이 있어서 가게는 번창했다. 우인은 나와 같은 일본 태생의 재일조선인 2세지만 최근 부모 고향인 제주도에 자그마한 땅을 살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한번은 내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도 아직은 좀더 애쓰지 않으면 여생을 편하게 보낼 여유가 도무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베라 타르는 과묵한 인물이지만 우인의 얘기에 촉발된듯 제2차 세계대전 뒤의 국경선 변경에 따라 헝가리 주변국가에서 마이너리티(소수자)로 살아가게 된 동족들이 경험해온 여러 곤란한 일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베라도 클레이피도 디아스포라(이산민족)다. 그들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 처음 알게 됐지만 금방 자신들의 처지에 비춰보고 이 불고깃집 주인 얘기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 때 헤어진 뒤 10년 만에 만났으나, 클레이피는 나를 만나자마자 먼저 그 불고깃집 얘기를 떠올렸다. “그때는 재미있었어요. 또 가봅시다.”
실은 클레이피는 그때 이후 이번의 〈루트 181〉을 낼 때까지 8년간이나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이유는 ‘오슬로 합의’의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오슬로 합의’란 1993년의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에 관한 원칙 선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선언은 일본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평화를 향한 획기적인 제1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사자인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아라파트 의장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클레이피에게 충격을 준 것은 ‘오슬로 합의’가 안겨주었던 평화실현 기대가 깨져버린 사실이 아니라 ‘오슬로 합의’가 타결됐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 유대인 정착지의 철거, 동예루살렘의 귀속 등 팔레스타인쪽으로선 양도할 수 없는 원칙적인 요구를 몽땅 무시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당한 점령을 기정사실로 승인하고 원래 살고 있던 선주민인 팔레스타인인을 명목만의 ‘자치구’에 가둬버리는 격리와 지배의 정책이었다.

사실상의 굴복을 의미하는 이런 ‘합의’를 팔레스타인쪽이 수용했다는 사실이 클레이피에겐 충격이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땅이 지배자 유대인 군사국가와 피지배자 팔레스타인인의 약소국가로 분할된다. 그것은 모든 민족과 종파들이 평화적으로 공생하는 비종교적이고 민주적인 단일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그의 희망을 박살내는 것이었다.

그 클레이피가 이번에 실의를 박차고 다시 일어나서 〈루트 181〉을 제작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 자신의 말을 통해 들어보자. (‘타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계간 전야 별책·루트 181〉 수록)
“지난 3년간 이스라엘의 프로퍼갠더(선전) 공세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의 소리를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의를 찾아서 영원히 계속 출몰하는 햄릿이나 마르크스의 망령처럼 팔레스타인 문제는 끝없이 출몰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양심을 괴롭히게 될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에겐 악몽일 겁니다.”
점점 비관적으로 돼가는 상황속에서 ‘망령’이 되더라도 싸우겠다는 얘기다. 10월14일, 도쿄경제대학에서 상영회가 끝난 뒤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감독에게 질문했다.

“저는 재일조선인입니다만, 이 일본사회에서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역사에 무관심한 일본인들과 공생할 수 있을지 비관적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생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직하고 절실한 질문이었다.
클레이피 대신 시반이 학생들에게 얘기했다.

“나에겐 공생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결의의 문제이고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만일 내일 이 일본사회가 이스라엘처럼 돼버린다고 합시다.

이 대학 정문에 검문소가 설치되고 군대가 학생 한사람 한사람의 신분증명서를 체크합니다. 일본인이라면 프리패스(자유통행)지만 재일조선인들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온갖 심문을 다 받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연행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합시다.

그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은 일본인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불의를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더욱더 이 부당한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항의할 것인가. 그런 결의와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나는 후자쪽 삶의 방식을 실천하려 하고 있는 겁니다.”


“만일 일본이 이스라엘처럼 된다면”이라는 비유가 내게 생생한 리얼리티(현실감)로 다가오는 것을 절감했다. 실제로 일본사회는 그렇게 돼가고 있다. 200명 이상의 학생(그 대부분은 일본인)이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명이 시반과 같은 삶의 방식을 실천할 수 있을까? ■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