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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 히로시마를 걸으며

by eunic 2005. 12. 23.

[심야통신] 히로시마를 걸으며

‘전쟁할 수 있는 일본’

위험한 게임은 시작됐다

총선뒤 그곳을 찾았다
원폭의 지옥도 더듬으며

“그때 그 일을 상상하라”

평화교육을 대신했다

[한겨레]2005-10-07 06판 M07면 3033자 특집 기획,연재

9월11일 치러진 일본 총선거에서는 여당인 자민당이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대패한 제1야당 민주당은 선거 뒤 당 이미지 쇄신을 위해 서둘러 당수를 새로 선출했다. 새 당수로 뽑힌 마에하라 세이지는 40대 초반이라는, 일본 정계에서는 예외적으로 젊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는 개헌론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취임하자마자 열린 기자회견에서 헌법의 전쟁포기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로써 일본 여·야당은 모두 헌법을 개정해서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삼고 집단적 자위권을 승인하려는 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앞으로 일본은 급속도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전락해 갈 것이다.

일본은 헌법 제9조에서 전력을 보유하지 않고 교전권을 포기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침략전쟁의 가해국으로서 국제사회에 대해 약속한 공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피해국민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변신한다는 건 이 중대한 국제공약을 파기한다는 걸 의미한다.

가해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지 않는 한 ‘피해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설령 ‘피해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할지라도 ‘전쟁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은 장래에도 전쟁포기 입장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토론프로를 보고 있자니, 출연자 한사람이 “헌법에서 교전권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없고, 그 때문에 북조선(북한)으로부터 모욕당하고 있다”고 발언했는데도 출석하고 있던 여·야당 의원 누구 한 사람 그 호전적인 발언을 나무라는 자가 없었다. 그것이 현재 일본 국민 대다수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다. 앞으로 북조선이 핵무장을 추진하면 일본에서도 핵무장론이 세를 얻게 될 것이다.

일본에서 비이성적인 대북 강경론의 대두는 개헌과 군사화를 꾀하는 우파세력에게 절호의 구실을 마련해주는 꼴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파시즘과 전쟁으로 가는 문을 여는 위험한 게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게임은 이미 멈추기 어려운 자기증식 과정에 돌입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대단한 지혜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 대화적인 이성, 무엇보다도 평화를 향한 강한 의지가 지금처럼 절실한 때도 없었다.

*
선거 뒤인 9월15일 학생들과 함께 히로시마를 찾았다. 하라 다미키라는 소설가의 행적을 더듬어보는 여행이다. 하라 다미키에 대해서는 전에도 썼다.(제5회째 글)
그의 대표작인 〈여름 꽃〉은 원폭이 투하된 1945년 8월6일 아침부터 그 다음날까지의 기록이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순간 때마침 변소(화장실)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즉사를 면한 하라 다미키는 “이 일을 글로 남겨 놓아야 한다”고 직감한다. 그러나 일순간에 폐허로 변한 히로시마 거리를 헤매던 그가 목격한 것은 그때까지의 모든 상상을 초월한 참상이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모든 것”이 말살된 “정밀교치한 방법으로 실현된 새 지옥”이었다.

현재의 사람이 하라 다미키가 써서 남긴 ‘새 지옥’의 모습을 리얼하게 상상하기란 실제로는 극히 어렵다. 원폭 자료관 등의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자료는 전쟁의 비참함, 피해의 잔혹함을 말해 주고 있으나 다수의 관람자들에게 그것은 자신의 일상생활과는 무관한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박물관 바깥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거기서 본 것들은 단지 지식이나 정보로서 기억의 서랍 깊숙이 처박히고 나날의 생활은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된다. 일본에서는 평화교육을 꽤 열심히 해 왔으나 그것은 일종의 정형화의 함정에 빠져, 학생들 다수에게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따분한 의식이 돼버렸다.

이 벽을 어떻게든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상상력’ ‘대화적인 이성’ ‘평화를 향한 강한 의지’를 지닌 시민을 한 사람이라도 늘려가야 한다.

그것은 현재의 절박한 요구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학생들과 〈여름 꽃〉을 숙독하고 피폭 당일 하라 다미키가 헤매고 다니던 거리를 실제로 걸어보는 시도를 한 것이다.

더운 오후, 안내해준 하라 다미키의 조카뻘 되는 사람 뒤를 따라 우리는 히로시마의 거리를 걸었다. “여기가 하라 다미키의 생가” “여기는 우왕좌왕하며 도망치던 여학생들과 마주친 장소” “여기가 많은 주검들이 떠다니던 강” “여기는 피폭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낸 신사” “여기가 조카의 주검을 발견한 길”…. 중학생이었던 조카의 주검을 발견한 하라 다미키 일행은, 그러나 그 주검을 옮길 수 없어 그나마 유물로 삼기 위해 주검에서 손톱을 잘라 갖고 갔다고 한다.

조카의 주검은 다른 수많은 이름모를 주검들과 함께 가까운 공원에 묻혔다. 지금은 그 장소에 작은 위령비가 서 있다.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땀을 연신 훔쳐가며 열심히 걸었다. 걸어다녔던 장소 어디에도 피폭 직후의 참상을 직접 상기시키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장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하는 것, 그것이 내가 자신과 학생들에게 부여한 과제였다.

안내해준 분은 마지막으로 하라 다미키의 낡은 수첩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가느다란 연필글씨로 쓴 피폭 당일의 극명한 메모가 남아 있었다. 지옥을 목격하고 평화를 위한 증인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거기에 새겨져 있었다.

피폭당한 지 5년 뒤 조선전쟁(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보도에 충격을 받은 그는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가 절망한 것은 미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무관심한 채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다음은 그가 남긴 시 〈집없는 아이의 크리스마스〉의 일절이다.

가련하고 어리석은 우리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파멸의 바로 한걸음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다시 불은 하늘에서 쏟아져내려/

내일 다시 사람은 불타 죽을 것입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해 즉사한 사람은 10만에 이르지만 실은 그 가운데 3만명은 우리 동포인 조선 사람이었다. 식민지 지배가 가져다준 어이없는 피해였다. 하지만 이 엄숙한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북조선에도 결코 많지 않다. ■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