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통신] 히로시마를 걸으며 ‘전쟁할 수 있는 일본’ 위험한 게임은 시작됐다 총선뒤 그곳을 찾았다 “그때 그 일을 상상하라” 평화교육을 대신했다 |
[한겨레]2005-10-07 06판 M07면 3033자 특집 기획,연재 |
9월11일 치러진 일본 총선거에서는 여당인 자민당이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대패한 제1야당 민주당은 선거 뒤 당 이미지 쇄신을 위해 서둘러 당수를 새로 선출했다. 새 당수로 뽑힌 마에하라 세이지는 40대 초반이라는, 일본 정계에서는 예외적으로 젊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는 개헌론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취임하자마자 열린 기자회견에서 헌법의 전쟁포기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로써 일본 여·야당은 모두 헌법을 개정해서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삼고 집단적 자위권을 승인하려는 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앞으로 일본은 급속도로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전락해 갈 것이다. 가해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지 않는 한 ‘피해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설령 ‘피해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할지라도 ‘전쟁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은 장래에도 전쟁포기 입장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일본에서 비이성적인 대북 강경론의 대두는 개헌과 군사화를 꾀하는 우파세력에게 절호의 구실을 마련해주는 꼴이 되고 있지만 그것은 파시즘과 전쟁으로 가는 문을 여는 위험한 게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게임은 이미 멈추기 어려운 자기증식 과정에 돌입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멈추기 위해서는 대단한 지혜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 대화적인 이성, 무엇보다도 평화를 향한 강한 의지가 지금처럼 절실한 때도 없었다. 그것은 현재의 절박한 요구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학생들과 〈여름 꽃〉을 숙독하고 피폭 당일 하라 다미키가 헤매고 다니던 거리를 실제로 걸어보는 시도를 한 것이다. 조카의 주검은 다른 수많은 이름모를 주검들과 함께 가까운 공원에 묻혔다. 지금은 그 장소에 작은 위령비가 서 있다.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땀을 연신 훔쳐가며 열심히 걸었다. 걸어다녔던 장소 어디에도 피폭 직후의 참상을 직접 상기시키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장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하는 것, 그것이 내가 자신과 학생들에게 부여한 과제였다. 거기에는 가느다란 연필글씨로 쓴 피폭 당일의 극명한 메모가 남아 있었다. 지옥을 목격하고 평화를 위한 증인이 되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거기에 새겨져 있었다. 피폭당한 지 5년 뒤 조선전쟁(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보도에 충격을 받은 그는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가 절망한 것은 미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무관심한 채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다음은 그가 남긴 시 〈집없는 아이의 크리스마스〉의 일절이다. 파멸의 바로 한걸음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다시 불은 하늘에서 쏟아져내려/ 내일 다시 사람은 불타 죽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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