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통신]‘우리의 브레히트’가 필요하다 우리민족이 평화통일을 하고 숱한 곤란을 극복한 뒤 베를리너 앙상블과 같은 |
[한겨레]2005-07-29 06판 M07면 2844자 특집 기획,연재 |
여름밤의 꿈(2) 〈아르투로 우이의 흥륭〉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41년 망명지인 미국에서 쓴 희곡이다. 1941년은 나치 독일이 전 유럽을 정복할 기세를 보이고 있던 때다. 그런 시기에 브레히트는 제3제국의 총통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망명지에서 적을 조롱하려 한 것이다. 바로 목숨을 건 웃음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 전후에는 바이에른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히틀러도 제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종군했다. 브레히트와 히틀러는 같은 전쟁을 체험한 동시대인이었다.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탈취하자 브레히트는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15년간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소련,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을 전전하면서 쉼없이 펜으로 반나치 투쟁을 계속했다. 1938년에 쓰인 ‘다음 시대의 사람들에게’라는 긴 시는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둡다”라는 행으로 시작한다. 그 시구 가운데 몇가지를 떠올려 본다. “내가 도시에 온 것은 혼란의 시대/ 기아의 시대. 내가 사람들과 어울린 것은 폭동의 시대. 나는 반역했다, 그들과 함께. 이렇게 해서 나의 시대는 흘러갔다. 내게 주어진 시간, 지상의 시간.” “내 힘은 보잘것없었다. 목적지는 아직도 멀었다. 그래도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설사 나 자신은 거기에 당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대들, 우리가 침몰해가는 조류 속에서 언젠가 떠올라올 그대들, 생각하라, 우리들의 허약함을 얘기할 때, 이 시대의 어두움도 함께.” “아아, 우리들은, 우애의 땅을 준비하려 한 우리들 자신은, 우애만으로 살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대들, 언젠가는 마침내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치게 될 때, 생각하라, 우리들을, 넓은 마음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브레히트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미국에서는 연극계, 영화계의 좌익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고 마침내 매카시즘 선풍이 거칠게 불어닥치게 된다. 이런 공기를 감지한 브레히트는 1947년 스위스로 탈출한다. 1948년 말에 동베를린에 귀국해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다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의 작품을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어둡던 시대의 고투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목적지는 아직도 멀기 때문에. 〈아르투로 우이의 흥륭〉은 브레히트 사후인 60년에 초연돼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도쿄에서 상연된 것은 95년에 하이너 뮐러가 연출했던 것이다. 연극이 시작되면 무대 위에 상반신을 벗은 자그마한 사내가 옆으로 드러누워 새빨간 혀를 내밀고 들개처럼 헐떡이고 있다. 20세기 미술의 거장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 남자가 마르틴 부트케가 분한 주인공 아르투로 우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이는 히틀러를 희화화한 것이다. 다른 등장인물도 모두 실재한 괴링, 괴벨스, 레임, 힌덴부르크 등과 대응하고 있다. 부트케는 경탄할 수밖에 없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비참한 들개와 같았던 우이가 ‘신념’이라는 말을 연발하며 온갖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서 서서히 ‘악’의 실재감을 드러내고 ‘악’의 광휘와 같은 매력조차 느끼게 만든다. 하이너 뮐러는 오랫동안 동독에서 연극활동을 해왔다. 사회주의사회의 모순을 다뤘기 때문에 동독 정부와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고, 60년대에는 그가 연출한 작품은 동독에서 상연이 금지당했다. 70년대에 들어 서독에서 상연 기회가 늘어 80년대부터는 다시 동독에서도 상연할 수 있게 된다. 동서독 통일 뒤 베를리너 앙상블의 예술감독에 취임해 95년에 새로 연출한 〈아르투로 우이의 흥륭〉를 대성공으로 이끌었으나 그해 12월 타계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면 하이너 뮐러는 이른바 사회주의사회 내의 ‘반체제파’로 보이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잘라 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동독에서 불우했던 시대에 서독으로 망명하라는 권유를 그는 몇번이나 거절했다. “서쪽은 너무 따분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독일 통일 뒤 그는 “동독에서 나는 고야였다”고 말했다. 18세기 말 스페인 궁정화가였던 고야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사상을 몹시 동경했으나 스페인을 침공한 나폴레옹군의 포악한 짓에 분개해 은밀히 〈전쟁의 참화〉 시리즈라는 명작을 남겼다. 자신이 현대의 고야라고 한 뮐러의 말은, 자신이 사회주의 이상과 현실정치와의 분열을 물려받아 체현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르투로 우이의 흥륭〉은 원래 브레히트의 원작에서는 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붙어 있다. 에필로그는 “이런 괴물을 낳은 모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경고를 발한다. 우리의 일상에 히틀러나 나치즘을 낳을 위험성이 잠재해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하이너 뮐러 연출에서는 이 유명한 경고가 삭제돼 있다. 설마 이젠 안심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은 이런 경고가 너무 당연한 현실에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막이 내린 뒤 나는 흡사 여름밤의 꿈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감성이 아직 개발되지 못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미처 발달하지 못한 젊은이들, ‘다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 브레히트와 하이너 뮐러의 유산이 가 닿았을까. 학생들이 흥분하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니 그래도 나의 시행착오가 자그마한 성과를 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다행이겠는데…. 이것이 첫번째 꿈이다. 두번째 꿈. 우리 민족이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숱한 곤란을 극복해서 베를리너 앙상블과 같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닌 예술을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날이 올까. 그날이 오기를 항상 꿈꾸고 싶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브레히트, 우리의 하이너 뮐러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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