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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곤란한 시대를 건너는 법/학대받은 자의 지혜

by eunic 2005. 12. 23.
곤란한 시대를 건너는 법


△ 서경식/ 도쿄경제대학교수

지식인의 역할(2)
-학대받은 자의 지혜

나는 지금 서울 중심부의 S호텔에 묵고 있다. 6월도 중순이어서 마침내 여름같은 날씨가 됐다. 그런데 서울은 어디를 가든 건물 내부의 냉방이 너무 세다. 잠시만 있어도 하반신부터 오슬오슬 냉기가 올라온다. 나는 또 몸 상태가 나빠져 심한 기침으로 고생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 무더운 장마(쓰유)가 한창이지만 한국에서는 장마가 시작되지 않아 더워도 상큼한만큼 냉방 강도를 좀 낮추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에너지 절약도 되고 지구환경에도 좋을 터이다.

이 호텔에서는 2, 3일 전부터 ‘6.15 남북 공동선언’ 5돌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호텔내 여기저기 그 참석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텔레비전을 켜니 뉴스에서는 남쪽 민간대표단의 평양 도착을 전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백낙청 단장의 인사가 화면에서 흘러나왔다.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한 백 교수의 음성이 약간은 들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지식인은 60년대부터 군사정권 반대·민주화운동의 핵심인물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최전선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 모습에서 광범한 남북교류가 가능해졌다는 기쁨보다도 한반도가 두번 다시 전장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사명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

내가 서울에 온 것은 S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의 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동아시아사회문화연구회(TSTH-Net)라는 사단법인의 창립기념행사에 토론자로 참가하기 위해서다. 보잘것없지만 이것도 평화를 위한 노력의 하나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우리 ‘조선민족’은 일본제국 식민지 지배에 이어 ‘6.25 조선(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다. 전쟁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개개인의 삶에까지 분단과 단절을 강요했다.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고향을 버리고 디아스포라(이산민족)가 돼 각지로 흩어졌다. 전쟁 상처가 치유되고 이산과 분단을 겪은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전쟁의 세기를 넘어
평화의 세기로 가려면
가옥한 시대에 의연히 버틴
못 배운, 내 어머니 같은
이데올로기나 제도 변방의
마이너리티들의 ‘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TSTH-Net은 이러한 상황인식에서 전쟁의 세기를 넘어 새로운 평화의 세기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 일본, 재일 ‘조선인’ 연구자들이 연대해서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에 관한 새로운 분석틀을 창출하려 한다. 그 이론 구축작업에는 디아스포라적 관점, 마이너리티(소수자)적 관점이 중시돼야 한다. 프레스센터(한국언론재단)에서 열린 창립기념토론회에서는 송연옥 교수가 ‘동아시아와 재일조선인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나와 한성대의 김귀옥 교수가 토론을 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근대에 만들어진 기성개념의 구속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재일조선인 여성의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라는 테마가 그날 논점의 하나였다.

내 어머니는 군사정권 시대에 옥중의 형들을 면회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 감옥(교도소)으로 갔다. 그때마다 교도소 관리들은 형들이 사상전향을 하도록 설득하라고 어머니를 압박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울면서 전향하도록 설득하기 마련이다. 보통의 자식들이라면 어머니가 울며 불효를 나무라면 후회하게 돼 있다”는 게 그들 얘기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관리들 말을 듣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내게는 전향인지 뭔지 어려운 얘긴 모르겠소”라고 대답했다.

옥중의 자식들에게는 눈물도 거의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관리들은 “역시 빨갱이의 어머니답다.

재일교포에게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도 충성심도 없다”고 매도했다.

저 가혹했던 시대, 비탄에 잠겨 있던 어머니가 어찌 그토록 의연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전향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어머니는 1922년생이다. 그때 이미 조국은 일제 식민지였다.

192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어릴 때부터 학교에 가지 못하고 계속 노동자로 살았다.

학교에서 읽기 쓰기를 배울 수 없었던 만큼 ‘애국심’이니 ‘국가에 대한 충성심’ 따위의 쓰잘데없는 것을 주입받지도 않았다. 1945년 일제의 패배와 함께 ‘광복’이 찾아왔으나 어머니는 일본에 남아 나날의 생활에 쫓기고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했으나 그것은 어머니와 같은 재일조선인과는 인연이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을 갖도록 하라는 건 무리한 얘기다. 어머니에게 대한민국의 관리들은, 대통령이든 간수(교도관)든 모두 자식들을 괴롭히는 나쁜 놈들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조선사람인 것’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동족을 멸시하고 일본인을 동경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인 가정에서 일하고 있던 어릴 적부터 “이대로 가면 내가 일본인이 돼버리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인한테서 차별받았을 때 누구보다도 거세게 분노한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에게는 일본인도 자기들 조선인을 괴롭히는 나쁜 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에겐 필시 근대적인 교육이 가져다 준 지식이나 이론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근대적인 개념에 지배당하지 않는 ‘지혜’와 같은 것이 있었다.

디아스포라이자 마이너리티라는 것은 이처럼 국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제도의 변방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에 우리가 근대의 부정적인 측면-그 정점이 전쟁이다-을 넘어 다음 시대를 전망하기 위한 귀중한 시사가 내포돼 있는 게 아닐까.

전쟁체제로 전락해가고 있는 지금의 일본에 지식인의 책임을 자각하고 저항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너무 적다. 동료들과 <전야>라는 잡지를 창간했을 때 나는 저 암흑의 60년대에 <창작과 비평>을 창간한 조국 사람들의 비장한 결의와 고매한 사명감을 상기하고 있었다.

나는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이 곤란한 시대가 내게 부여한 역할을 해내고 싶다. 그리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식인이고자 한다면 내 어머니와 그밖의 마이너리티들의 ‘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걸 명심하고 있다.

번역=한승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