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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 5월, 정말 봄이 온 것일까

by eunic 2005. 12. 23.
5월, 정말 봄이 온 것일까


△ 서경식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남. 작가. 도쿄경제대학 교수. 인권문제, 민족문제 등의 강좌를 맡고 있음. 주요 저서는 <소년의 눈물>(가시와서방, 돌베개사 번역 간행), <나의 서양미술 순례>(미스즈서방, 창작과 비평사 번역 출간),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아사히신문사, 창작과 비평사 번역 출간 예정) 등.

5월은 1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요 며칠 도쿄는 구름이 덮이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기온은 평년보다 10도 정도 낮았다. 오늘은 학생들과 국립서양미술관에 다녀왔는데, 우에노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도 철지난 코트차림을 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구 규모의 기상이변 탓일까? 농사에 영향이 없을지 걱정이다. 7, 8년 전 일이지만, 여름에 비가 계속 내리면서 이상저온 상태가 됐던 적이 있다. 일본어로는 '레이카(冷夏)'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뭐라고 할까?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는 레이카 때문에 흉작을 만난 농민의 마음을 "추운 여름은 갈팡질팡 걷고"라고 읊었지만, 나는 그해 ‘이북’의 흉작과 기아 보도를 접할 때마다 바로 “갈팡질팡”해 마지 않았다. 그때 나는 독일의 여성화가 케테 콜비츠의 한 작품을 들어 짧은 문장을 썼다. 굶주린 아이들이 손에 손에 그릇을 들고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는 작품이다. 올해도 그런 여름이 올까?

*

중국의 문호 루쉰은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 일찍 주목해서 중국에 소개했을 뿐 아니라 목판화 운동이라는 민중미술운동을 확산시키는데 활용했다. 1931년 루쉰의 동지인 청년작가 5명이 백색테러의 희생이 돼 처형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루쉰이 2년 뒤 이때의 통한의 심정을 쓴 글이 ‘망각을 위한 기념’이다.

“나는 이전부터 뭔가 짧은 글이라도 써서 몇몇 청년작가들을 기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지난 2년간 내 마음이 거듭 비분강개에 사로잡혔고 지금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시각을 바꾸고 비애를 떨쳐내 홀가분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그들의 일을 잊고 싶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루쉰은 희생자의 한사람인 유석(柔石)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먼 시골에 살고 있는 유석의 노모는 장님으로, 자식이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학살당한 사실을 모른다. 루쉰은 <북두(北斗)>라는 잡지가 창간됐을 때 유석에 대해 뭔가 글을 쓰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희생>이라는 제목이 붙은 콜비츠의 목판화-한 어머니가 슬픈 표정으로 자식을 바치고 있는 그림을 골라’ 남몰래 자신만의 기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두형님은 옥중에 있었다
암투병까지 하던 어머니에게
광주항쟁은 치명타였다
진정한 봄을 맞지 못하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 3년 뒤인 1936년, 루쉰은 ‘심야에 적는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콜비츠의 작품에는 “빈궁과 병, 굶주림, 죽음, 그리고 저항과 투쟁도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적었다. 그것은 바로 작자의 자화상이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얼굴에 떠올리면서도 자애와 연민의 감정을 띠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모욕받고 학대당한 자’의 어머니 심상이었다.”

그리고 루쉰은 콜비츠의 작품이 중국의 청년예술학도에게 주는 이익에 대해 말한다. “이 (콜비츠의) 화집을 통해, 세계에는 아직도 많은 장소에서 ‘모욕받고 학대당한 자’들이 있다는 것, 그들이 우리와 같은 벗이라는 것, 또한 그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고 부르짖고 싸우고 있는 예술가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야에 적는다’의 후반은 인범(人凡)(본명은 류평약·劉平若)이라는 젊은이의 옥중 체험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거기에는 백색테러세력의 감옥에서 얼마나 가혹한 고문이 행해지고 있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살해되고 있는지 간결하게 씌어 있다. 나는 1970년대 일본에 있으면서 이 부분을 되풀이해서 읽고 군사독재정권하에 있는 조국의 감옥을 상상하고 있었다.

같은 1936년에 쓴 ‘죽음’이라는 글도 콜비츠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작품에는 루쉰의 유언에 해당하는 말이 7개 항목으로 씌어져 있다. 마지막 항목은 이렇다. “타인의 이빨이나 눈을 상하게 하면서 보복에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그런 인간에게는 절대 가까이 가지 마라.”

이 글이 발표된 지 1개월 뒤인 1936년 10월19일 루쉰은 세상을 떠났다. 1881년생이었으므로 55살 때였다. 지금의 나와 거의 같은 나이다.

고상한 인도나 인류애를 입에 올리면서 실제로는 ‘모욕받고 학대당한 자’에 대한 억압을 묵인하는 위선과 기만을 루쉰은 무엇보다 증오했다.

전근대적 봉건주의의 ‘암흑’에 온몸으로 맞서면서 외래의 식민지주의와 평생동안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때때로 루쉰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는 것은 내가 본 ‘암흑’이 아직 그가 본 것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

또 한밤중을 넘겼다. 고요와 함께 5월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냉기가 몸에 스며 온다. 내일은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간다. 한국의 5월은 어떠할까? 사람들은 길고 추운 겨울 뒤 찾아온 봄을 만끽하고 있을까? 그러나 5월은 잔혹한 달이다. 광주민주항쟁으로부터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러나 5월은 군사독재정치의 ‘백색테러’에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불행한 어머니들의 기억으로 가득차 있다.

그 당시 나의 형님 두 분이 정치범으로 옥중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을 면회하려고 일본과 한국을 오갔다. 어렸을 때 조국을 떠나 단 한번도 학교에 다닌 적도 없이 일생을 노동을 하며 보낸 어머니는 그 인생의 마지막을 더욱 가혹한 꼴로 맞아야 했다. 병상에서 암 때문에 격통에 시달리던 어머니에게 광주사건 보도는 치명타를 가했다.

겨울은 가고 봄이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봄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엄동의 기억만을 안은 채 어머니는 생애를 마쳤다. 겨울은 가고 봄이 왔다…. 그게 정말일까? 내 마음은 편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