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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승산없는 싸움일지라도.../ 에드워드 사이드를 생각한다

by eunic 2005. 12. 23.
승산없는 싸움일지라도…


△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서경식의 심야통신
지식인의 역할(1)
-에드워드 사이드를 생각한다

5월과 6월은 대학 강의 등 통상적인 일에 덧붙여 여러 곳의 강연이나 학회보고 예정이 많아 바쁜 나날이 계속된다. 지난 주 토요일은 역사학연구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이번 주 토요일은 일본평화학회에서 보고서를 발표했다. 다음 주 토요일은 미디어 종합연구소가 주최하는 심포지움에 출석한다.

6월14일에는 서울로 가 ‘TSTH-Net’ 발족기념 토론회에 참가한다. TSTH-Net란 Trans Social Theory and History Network의 약자로 ‘사회이론과 역사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숙명여대 윤경순 교수의 노력으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재일 조선인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발족시킨 연구재단이다. 서울에서 돌아오면 다음은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이라는 강연을 하기 위해 홋카이도 삿포로로 날아가야 한다.

어쨌든 바쁘다. 나는 그다지 건강한 편이 아니어서 정직하게 말하면 이런 일은 줄이고 싶다. 그러나 위에 말한 일 가운데 어느것이나 생각하면 할수록 거절할 수 없는 일이다.

*

역사학연구회의 전체회의 테마는 ‘이슬람과 미국(아메리카)-민주주의라는 현혹’이라는 것이었다. 이 테마를 정한 주최자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은 이것을 ‘세계민주화혁명’ 투쟁이라 위치지우고 있다. 이슬람 세계를 일괄해서 ‘비민주적’이라고 간주하고 민주적인 ‘우리’와 비민주적인 ‘그들’이라는 단순화된 대립구도를 강조해서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단순화야말로 민주주의 이념에 반하는 게 아닌가. 역사학연구자는 이런 단순화의 함정에 현혹돼선 안된다.

중동 전문가인 우스키 아키라 교수의 ‘내셔널리즘으로서의 이슬람’, 미국 현대사 전문가 츄죠 켄 교수의 ‘이념국가를 되묻는 일’이라는 2개의 보고가 있은 뒤 양자의 보고에 대해 논평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미국이 ‘테러와 전쟁’에서 북한을 선제공격할 땐
조국의 동포들은 물론 재일 조선인들도 무사할 리가 없다
때문에 “승산이 없음에도 진실을 설파해야 한다”는
지식인의 역활을 잊지 않고 살려 한다

나는 중동이나 미국 전문가는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역사연구자도 아니다. 따라서 처음엔 이 의뢰를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주최자는 열심히 이렇게 설득했다.

“‘이슬람과 미국(아메리카)’이라는 것은 현대세계의 시급한 문제이고, 특히 일본인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생각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학연구자들 중 다수는 자신의 전문영역속에 들어박혀 있기 때문에 참가자는 이것을 ‘남의 일’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따라서 재일 조선인의 시각에서 이 테마를 일본과 동아시아의 현실에 적용해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망설인 끝에 이 어려운 역할을 떠맡기로 결심했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다.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 등의 대저로 잘 알려진 사이드는 1935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팔레스타인 출신이지만 직접 난민체험을 한 적은 없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미국 동부해안 지역에서 학자로서의 자기형성 과정을 거쳤다.

현대의 지적 거인의 한사람이다.

그는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과 이스라엘의 부당한 팔레스타인 지역 점령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자각을 강하게 갖게 됐다고 한다.

부친이 미국국적 보유자였던 그는 ‘미국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팔레스타인인’의 일원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연구를 통해 서구 근대사상에 빠져 있던 자기중심주의를 도려냈을 뿐만 아니라 묵살당해온 팔레스타인 민중의 소리를 세계에 대변하는 역할을 자청해서 떠맡았다.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적의와 편견에 사로잡힌 미국사회에서 그런 역할은 얼마나 곤란한 일이었을까?

“학자로서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던가, 왜 실천적인 정치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사이드는 “내게 정말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1967년 이후 어느 시점에 나는 자신이 소집당했다고 느꼈다”라고 대답했다.

“팔레스타인 투쟁이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실을 설파해가려는 의지의 문제였다.”(<펜과 칼>)

미국과 영국이 전혀 대의명분이 없는 이라크전쟁을 시작한 지 반년 뒤 사이드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과 일본은 지금도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북(북한)’을 선제공격한다면, 그리고 한반도가 다시 전장이 된다면-악몽과 같은 상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때는 남북을 불문하고 조국의 동포들에게 무서운 재앙이 덮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일본에 있는 재일 조선인들도 무사할 리가 없다. 현재 미국의 아랍계 시민이 체험하고 있는 곤란 이상의 일을 겪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사이드는 식민지주의 시대가 낳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이산민족)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집’ 소리에 응해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실을 설파해가려는 의지”를 관철하며 살았다.

그것은 현대 지식인이 떠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명확한 회답이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사람인 나도 또한 사이드가 남긴 말을 잊지 말고 진실을 계속 이야기해 가려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처럼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