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통신] 대화의 문 닫은 ‘편지’를 받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 고통 · 굴욕의 기억 드러낸 레비와 일본군 위안부 증언 |
[한겨레]2005-08-12 06판 M27면 2835자 특집 기획,연재 |
기억의 싸움(1)
어느 더운 날 오후 회의에 참석하려고 출근해 보니 내 메일박스에 엽서가 한장 떠 있었다. 학생한테서 온 근황보고인가, 아니면 독자가 독후감이라도 보내온 걸까. 어느 쪽이 됐든 편지를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당신은 폭한이 칼을 들고 다가오는데도 그자를 친구라고 생각해 악수하겠다고 손을 내밀 사람이다. 쿡 찔릴 때까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양반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지인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엽서를 읽어 보니 밥 속에 섞인 모래를 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쾌하진 못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겠기에 독자 여러분에게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나 ‘종군위안부’(일본군대 위안부) 등의 문제는 ‘항일운동’과 세트(짝)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본을 비난하는 중국이나 한국의 운동은 공격적이어서 ‘타자에 대한 편견·적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너무 일방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일본 쪽도 할 말이 있다고 반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선생의 일이나 경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일본인으로서, 일본명이 아닌 이름을 화면에 비추면서 일본 쪽만 나쁜 듯이 말씀하시는 선생의 모습을 문득 봤을 때, 죄송하지만 강한 증오감을 느꼈습니다. 억눌러야 할 ‘타국인을 배제하고 싶은 기분’이 증폭됐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리모 레비도 항일운동도 서로 얘기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올해 2월22일은 내가 출연해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60돌을 맞아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했다. 제목은 ‘174517’로 잡았다. 이 엽서는 거기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었던 것이다. 보낸 이의 주소나 이름은 씌어 있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는 1919년 토리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토리노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말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빨치산(파르티잔) 활동에 참여했다가 파시스트군에 붙잡혔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보내져 가혹하기 그지없는 강제노동에 처해졌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아 해방됐다. 이탈리아에서 그와 함께 같은 열차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615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그를 포함한 3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문학자로서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평화를 위한 증언자로서 쉼없이 활동했다. 그는 왜 자살했을까? 그 죽음은 ‘기억과 증언’을 둘러싼 우리들의 인식에 깊은 의문을 던졌다. 이 의문을 고찰하기 위해 나 자신 토리노에 갔고 〈프리모 레비를 찾아나선 여행〉(아사히신문사)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레비의 친구로 아우슈비츠 생환자인 줄리아나 테데스키라는 고령의 여성이다. 그는 생환 뒤 고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정년 때까지 늘 겨울에도 반소매 차림으로 지냈다고 한다. 왼팔에 새겨넣은 수인번호가 동료나 학생들에게 보이도록 굳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왜 그런 곳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두고 있나요?”라는 질문도 받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상 최악의 범죄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기억의 싸움’이란 바로 그런 그를 두고 할 수 있는 얘기다.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무리일 겁니다.”
스스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과 굴욕의 기억을 불러내 온몸으로 미래의 평화를 위해 증언해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역사의 교훈에 등을 돌리고 있다. 레비의 묘에 새겨진 수인번호는 증언자를 가벼이 여기고 쉽게 과거를 잊은 채 다음 전쟁을 향해 흘러가는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경고가 아닐까.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그 프로에서 내가 말한 내용이다. 일본군 ‘위안부’ 등 동아시아의 증언자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평화를 위해 그 증언이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했다. 엽서를 보낸 사람은 “함께 이야기한다”거나 “서로 이해하는 자세”라는 말을 늘어놨지만 나와 대화하려는 마음은 없었던 듯했다. 어쨌든 이름도 연락처도 써놓지 않았으므로. (계속) ■ |
'명품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야통신] 보수의 그림자 드리운 음악제 (0) | 2005.12.23 |
---|---|
[심야통신]망각의 늪에 빠진 일본의 ‘양민’들 (0) | 2005.12.23 |
[심야통신] 교양교육 홀대하는 일본의 대학 (0) | 2005.12.23 |
[심야통신]‘우리의 브레히트’가 필요하다 (0) | 2005.12.23 |
[심야통신]곤란한 시대를 건너는 법/학대받은 자의 지혜 (0) | 2005.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