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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 대화의 문 닫은 ‘편지’를 받다

by eunic 2005. 12. 23.

[심야통신] 대화의 문 닫은 ‘편지’를 받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 고통 · 굴욕의 기억 드러낸 레비와 일본군 위안부 증언
무겁게 받아들이자는 말이 편견 · 적의 가득찼다 한다
“함께 이야기하자”라는 말 늘어놓았던 그는, 정작 이름도 연락처도 안남겼다

[한겨레]2005-08-12 06판 M27면 2835자 특집 기획,연재

기억의 싸움(1)


일본의 대학은 7월 중순부터 여름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학생들이 사라진 캠퍼스는 한산하다. 그래도 우리 교원들의 일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느 더운 날 오후 회의에 참석하려고 출근해 보니 내 메일박스에 엽서가 한장 떠 있었다.

학생한테서 온 근황보고인가, 아니면 독자가 독후감이라도 보내온 걸까. 어느 쪽이 됐든 편지를 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내 태평스런 성격에 대해 평소부터 염려해 오던 지인은 곧잘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폭한이 칼을 들고 다가오는데도 그자를 친구라고 생각해 악수하겠다고 손을 내밀 사람이다. 쿡 찔릴 때까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양반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지인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엽서를 읽어 보니 밥 속에 섞인 모래를 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쾌하진 못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겠기에 독자 여러분에게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전쟁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의식은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일본군대 위안부) 등의 문제는 ‘항일운동’과 세트(짝)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본을 비난하는 중국이나 한국의 운동은 공격적이어서 ‘타자에 대한 편견·적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너무 일방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일본 쪽도 할 말이 있다고 반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선생의 일이나 경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일본인으로서, 일본명이 아닌 이름을 화면에 비추면서 일본 쪽만 나쁜 듯이 말씀하시는 선생의 모습을 문득 봤을 때, 죄송하지만 강한 증오감을 느꼈습니다.

억눌러야 할 ‘타국인을 배제하고 싶은 기분’이 증폭됐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리모 레비도 항일운동도 서로 얘기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엔에이치케이(NHK)방송〉에 ‘시점·논점’이라는 프로가 있다. 사외의 논객이 한가지 테마를 선택해 15분 정도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논술 프로다.

올해 2월22일은 내가 출연해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60돌을 맞아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했다. 제목은 ‘174517’로 잡았다. 이 엽서는 거기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었던 것이다. 보낸 이의 주소나 이름은 씌어 있지 않았다.

‘174517’은 이탈리아 문학자 프리모 레비의 묘비에 새겨진 숫자다. 그리고 실은 이 숫자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됐을 때 그의 왼팔에 새겨진 수인번호였다.

프리모 레비는 1919년 토리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토리노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말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빨치산(파르티잔) 활동에 참여했다가 파시스트군에 붙잡혔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보내져 가혹하기 그지없는 강제노동에 처해졌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아 해방됐다.

이탈리아에서 그와 함께 같은 열차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615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그를 포함한 3명에 지나지 않았다.

생환 뒤의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증언하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수용소에서 철저히 부정당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로서, 또한 현대사회에 편재하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불길한 경종’으로서 높이 평가받아 독일 등 유럽 각국, 미국, 일본 등에서도 번역됐다.

그 뒤 그는 문학자로서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평화를 위한 증언자로서 쉼없이 활동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1987년에 자살했다.

그는 왜 자살했을까?

그 죽음은 ‘기억과 증언’을 둘러싼 우리들의 인식에 깊은 의문을 던졌다. 이 의문을 고찰하기 위해 나 자신 토리노에 갔고 〈프리모 레비를 찾아나선 여행〉(아사히신문사)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두번째로 토리노에 간 것은 내 책을 원본으로 삼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레비의 담당 편집자나 저항운동 동지였던 여성 등의 관계자들을 만나 귀중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레비의 친구로 아우슈비츠 생환자인 줄리아나 테데스키라는 고령의 여성이다.

그는 생환 뒤 고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정년 때까지 늘 겨울에도 반소매 차림으로 지냈다고 한다.

왼팔에 새겨넣은 수인번호가 동료나 학생들에게 보이도록 굳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왜 그런 곳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두고 있나요?”라는 질문도 받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상 최악의 범죄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기억의 싸움’이란 바로 그런 그를 두고 할 수 있는 얘기다.

“앞으로 인류는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시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무리일 겁니다.”


테데스키나 프리모 레비는 평화를 위한 증인이었다.

스스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과 굴욕의 기억을 불러내 온몸으로 미래의 평화를 위해 증언해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역사의 교훈에 등을 돌리고 있다.

레비의 묘에 새겨진 수인번호는 증언자를 가벼이 여기고 쉽게 과거를 잊은 채 다음 전쟁을 향해 흘러가는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경고가 아닐까.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그 프로에서 내가 말한 내용이다. 일본군 ‘위안부’ 등 동아시아의 증언자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평화를 위해 그 증언이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한 시청자의 신경을 건드렸던 모양이다.

엽서를 보낸 사람은 “함께 이야기한다”거나 “서로 이해하는 자세”라는 말을 늘어놨지만 나와 대화하려는 마음은 없었던 듯했다. 어쨌든 이름도 연락처도 써놓지 않았으므로. (계속) ■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한승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