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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심야통신]망각의 늪에 빠진 일본의 ‘양민’들

by eunic 2005. 12. 23.

[심야통신]망각의 늪에 빠진 일본의 ‘양민’들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국수주의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양민’도 찬성한다
그러나 자국 침략의 역사를 양민들은 잊고 있으며
타자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방법도 모른채 증오감을 갖고 살고 있다

[한겨레]2005-08-26 06판 M07면 2828자 특집 기획,연재

기억의 싸움(2)


2월에 출연했던 텔레비전 논설 프로에서 한 발언 때문에 7월 말에 항의 엽서를 받았다. 전에도 우익인사로부터 해코지를 당한 적이 있지만 이번 것은 느낌이 좀 달랐다. 말투만 보면 정중했고, ‘타자’ 등의 어휘도 나이든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니었다.

그 엽서를 보낸 사람은 의외로 젊은 사람일지 모른다.

교육 정도도 대학생이거나 어쩌면 대학원생 수준일까.

엽서를 사서 컴퓨터로 작문을 하고 프린트한 다음 내 근무지 주소를 조사해서 수신자 이름을 쓰는 작업은 꽤 성가신 일이다.

방송을 한 지 5개월이나 지난 다음이다.

어떤 정열이 그를 그렇게 나서도록 만들었을까? (일단 ‘그’라고 했지만 여성일지도 모른다.)
올해 3월 이후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해진, 영토문제·일본 우파 교과서 채택문제·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문제 등에 대한 항의활동은 요즘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래도 8월6일 히로시마 원폭기념일이나 8월15일 종전기념일(‘패전’이라고 해야겠지만 일본에선 계속 ‘종전’이라는 기만적인 말을 쓰고 있다)이 가까워 오면 역사의 기억과 인식을 둘러싼 항쟁이 재연된다.

8월을 앞두고, 엽서를 보낸 인물의 마음속에 5개월 전의 프로가 떠오르면서 내게 비난의 말을 써 보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감정이 불타올랐을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굳이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할지 말지는 상당한 주목거리가 돼 있다. 우파는 중국이나 한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라, 공식 참배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리버럴한 중간파는 아시아 나라들과 평온하게 지내기 위해, 즉 순조롭게 상거래를 하기 위해 총리는 참배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현실주의적이고 외교적인 반대론이다.

침략의 역사를 직시하라는 역사인식론. 국가의 특정 종교 지지나 개입은 허용될 수 없다는 정교분리론. 국가의 전몰자 위령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쟁장치로서의 근대국가의 속성이며 전쟁이 없는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그런 점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비판. 이런 원칙적인 관점에 선 참배반대론은 아주 소수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찬성론은 반드시 전통적인 국수주의자나 보수적인 국가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게 엽서를 보낸 인물은 틀림없이 자신은 대화를 중시하는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민주주의 훈련이 돼 있지 않은 중국인”이나 “민족주의가 너무 강한 한국인”에 의한 피해자라는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 대다수는 처음엔 아마 이 인물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국수주의자가 아니다. 군국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가냘픈 양민이다. 하지만 자국의 역사를 모르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주권자라는 의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국가나 정부가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추궁받게 되면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곧바로 “관계없다”고 거부하는 것이다.

‘시점·논점’은 시청률이 높은 프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국방송이기 때문에 몇 백만 명의 사람들은 보고 있다.

이 한장의 엽서 배후에는, 내 이야기를 듣고 그처럼 “강한 증오”나 “타국인을 배제하고 싶은 기분”을 갖게 된 사람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존재할까?

몇 십만? 몇 백만? 짐작이 가지 않아 젊은 친구 두명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한사람은 역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 또 한사람은 고등학교 교원이다. 두사람 모두 재일 조선인이다.

“도대체 시청자 중 몇 퍼센트 정도가 필자와 같은 감상을 갖고 있다고 봐요?” 두사람은 엽서를 보고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 절반 이상이 아닐까요? 아니 8할쯤 될까.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아요. 우리들이 같은 세대의 일본인들과 이야기할 때 언제나 마주치는 반응이죠.” 이런 장소,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2월에 ‘시점·논점’에 출연한 뒤 3월 후반은 학생 몇명을 인솔해서 베를린의 전쟁유적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견학하고 왔다. 과연 그것이 얼마나 보탬이 될까? 하지만 그것은 내 나름의 ‘기억의 싸움’이었다.

베를린에서는 많은 것을 봤으나 그 가운데서 내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걸림돌’이다. 베를린 주재 한 일본인이 가르쳐 주었다.


그 크기는 보도에 깔린 돌만한 것으로 놋쇠 같은 금속제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도로 위나 주택의 현관 앞 여기저기에 그것이 있었다.

잠시 서서 자세히 보니 거기엔 사람 이름과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그 장소에 살고 있던 유대계 시민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이었고, 그들이 그 장소에서 쫓겨나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연월일이었다.

그 집 주인은 매일 현관을 출입할 때마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옛 주인이 강요당한 잔혹한 운명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보도 위를 걸어 직장에 서둘러 가는 사람들도 거기서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뒤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의 말로는, 그런 시도는 쾰른에 사는 어느 독일인 아티스트가 시작했는데 지금은 독일 각지로 퍼져 있는 모양이란다.

‘걸림돌’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거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인류의 역사가 걸려 넘어졌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을 잊어버리면 오늘날의 새로운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일반인들이 실제로 그 돌에 걸려, 자칫 잊기 쉬운 과거를 상기하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그 돌에 걸려본 사람은 누구라도 “관계없다”는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이며,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흡사 기지에 찬 게릴라전과 같은 ‘기억의 싸움’이었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