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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21] 어느 페미니스트의 유니크한 도발

by eunic 2005. 12. 15.
어느 페미니스트의 유니크한 도발

[김창석의 도전인터뷰]

극좌파에 에코이스트를 자처하는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정희진씨


“계급의식 없는 페미니스트보다 젠더의식 없는 마르크시스트가 편할 때도”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여성학자 정희진(38·서강대 강사)씨는 주목할 만한 여성주의자다.

무척 독특하고 도전적이어서 ’유니크’(unique)하다는 단어는 그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도 “정의되지 않는 사람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급속히 제도화하고 주류화하는 페미니즘의 지형 속에서 그는, “똑똑하지만, 뭔가 어렵고 위험한” 여성주의자로 통한다.

어떤 토론회에 가더라도 “대판 싸우는 일이 많다”.

그가 여성주의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성(섹슈얼리티)를 공부하는 그는 “여성의 피해나 처지를 논하는 여성주의, 공적인 영역의 이슈에 머물러 있던 여성주의를 넘어 여성의 시각과 여성의 언어로 인간과 세계를 다르게 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여성주의는 물론이고 그와 연관된 기존 담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로까지 나아가려 한다.

그의 이런 철학을 다룬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펴냄)은 그래서 급진적이며, 근본적이다. “여자들이 출세해야 빌붙어살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다가도 여성주의 조직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하는 직설화법의 소유자인 그를 11월11일 오후에 만났다.

왜 나는 <그날이 오면>노래를 싫어하나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제목보다 ‘경합하는 페미니즘’ 또는 ‘모순 속의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을 원했다고 책에서 밝혔는데, 어떤 의미인가.




△(사진/ 박승화 기자)

= <민족경제론>도 애초에는 그 제목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그 이름으로 학파도 생긴 것 아닌가.

출판사 쪽에서 처음에는 ‘정희진의 페미니즘 선언’이라고 하자고 해 질겁했다.

훌륭한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데. 출판사 쪽에서는 독특하고 도전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어한 것 같다.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설명하는 게 여성주의다.

정답이나 대안보다는 기존 질문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 여성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침묵을 강요받았던 다른 목소리도 가시화하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러니까 목소리들이 경합한다. 내가 가장 반대하는 패러다임이 뭐냐면, 노랫가사에도 나오지만,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하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아웃사이더>나 <당대비평> 같은 매체가 나오는 등 기존 진보 개념이 넓어졌다. 계급이나 민족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들이 가시화하고 경합하는 과정이 민주주의다.

<그날이 오면>이란 노래도 싫어한다. ‘그날’은 안 오고, 와서도 안 된다. 그날은 노무현의 ‘그날’이거나, 이성애자의 ‘그날’이거나, 경상도 남자의 ‘그날’일지 몰라도, 모든 사람의 그날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 ‘그날’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다. 나는 소수자를 나누는 경계나 기준에도 도전한다. 누구를 ‘소수자’라고 규정하는 권력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최근의 언론 보도 가운데 두 가지를 유심히 봤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출산 통계를 보면 셋째 아이의 성비(여자아이의 수를 100으로 하고, 남자아이의 여자아이에 대한 비를 나타내는 수치)는 132로 여전히 높았다.

그나마 10년 전인 1994년엔 202였더라.

남아선호 현상은 여전한데 학력에서의 ‘여고남저’ 현상은 급속도로 도드라진다. 사법시험(32.3%), 예비판사(49.1%), 의사국가시험(31.8%) 비율도 그렇고, 주요 국가자격시험 8개 수석자가 모두 여성이다.

= 한국의 남성과 여성 관계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권국가라고 부르지만, 밖에서는 그렇게 안 본다. 한국은 국제적으로는 (‘낙태’가 아니라) ‘여아 살해’와 가정폭력으로 악명이 높다.

국제회의를 가보면 가정폭력은 남한이 1등, 북한이 2등이다. 지역별로도 성비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1988년 대구·경북 지역 여아 살해가 가장 많았다.

박철언씨가 황태자로 등극할 때다. 여성 문제와 정치적 문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모든 사회문제는 여성 문제에 기반해서, 또는 매개해서 작동한다. 한국 여성들의 고등교육 수준은 세계 5위 안에 들지만, 노동시장 진출은 100등 밖이다.

많이 가르치는데 사회에 환원이 안 되고 결혼시장으로 흡수된다. 그러면서 여성들이 모든 자아실현을 자녀들 좋은 대학 보내는 데로 ‘올인’한다. 성차별, 교육(학벌), 계급 문제가 연동하는 것이다.

평등이란 ‘같음’이 아니라 ‘공정함’

당신의 책에서 “내 강의를 쉽다고 평하는 사람들은 주로 전업주부, 폭력 피해 여성, 저학력 생산직 여성노동자이며 어려워하는 사람은 전문직 종사자나 이른바 ‘여론지도층 인사들’”이라고 했다.

나도 책을 읽으면서 쉽지는 않았다. 남성이 여성주의 시선을 가져야 세상이 발전한다고 믿는 것 아닌가.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어떻게 하면 되나.


△(사진/ 박승화 기자)

=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마르크스는 중산층 부르주아지만 어떻게 노동자의 시선을 가졌나.

우리나라에서도 마르크시스트는 중산층이 대부분 아닌가. 우리 사회도 많이 변했다. 요즘 남자 복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는다. 군대에서 영혼이 망가졌는데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여성학을 듣는다고 한다. (웃음) 페미니스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을 뜻하는 건 아니지 않나.

피메일(female)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박근혜를 반대한다. 그러나 간단하지는 않다. 박근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피메일이지만, 피메일로서의 진보성이 있다.

생물학적인 여성은 성폭력에 반대한다. 성폭력의 위협을 24시간 느끼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지점이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 가운데 하나다. 나는 페미니스트에, 극좌파에, 에코주의자에, 반연령주의자다.

전복적 시각과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곳곳에 보인다. ‘평등’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도 신선하다.

= 내가 처음이 아니다.

나의 언어는 ‘또하나의 문화’를 비롯한 선배 여성주의자들의 지적 세례와 여성운동에 크게 빚지고 있다. 평등은 ‘같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공정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공적 영역인 노동시장에 많이 진출해 있는 만큼 남성들이 사적 영역에 들어가 있는가. 육아노동·가사노동·감정노동 같은 것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양성평등’은 여성들의 이중노동일 뿐이다. 남성 중심의 같음, 비장애인 중심의 같음, 미국 사람 중심의 같음은 ‘같음’이라기보다는 ‘폭력’이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 문제는 노동 문제라기보다는 인종 문제를 중심으로 봐야 한다. 우리의 시각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한국사회를 문제화해야 한다.

민주화운동은 여성운동에 빚졌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스스로 피 흘려본 적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참정권, 발언권 등을 민주화운동에 편승해서 얻었다는 얘기다.

페미니스트들의 헌신성과 실천성이 사회적 관심을 얻는 일도 드물다.

= 현재 여성운동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할 지점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지금도 미인대회를 반대해서 분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외부에서 왔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닌가.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애 낳으면 민주화운동 했겠나.

민주화운동 내부의 성별 분업이 얼마나 심한가. 복잡한 논쟁이지만, 여성운동이 민주화운동에 빚진 게 아니라 민주화운동이 여성운동에 빚진 것이다. 의존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약자가 강자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다. 강자가 약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사장님은 많은 사람을 먹여살리는 게 아니라 비서와 운전사와 가사노동자에 의존하는 것이다.

책에서 언급했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을 불편하게 한다.

거기에 더해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정도 이상으로 욕을 먹는 면도 있다.

그렇다고 욕하는 이들을 마초라고 몰아붙일 수 있는가.

페미니스트들의 어법이나 실천 양식에 문제가 있다거나 페미니스트들의 숙련도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의 문제라고 본다. 그런 식의 접근은 활동가 개인의 품성 문제로 환원되는데 무척 비과학적이다.

페미니즘이 지니는 전복성도 고려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어떤 면에서는 근대 사회과학 담론을 뒤집는다. (여성운동을 비판하는) 김규항씨 같은 이는 여성 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계급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계급의 반은 여성이다.

나의 주장은 계급보다 젠더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성차별 없이 계급이 작동하지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투사 심리라는 게 있다.

내 짐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보지 않기 위해 타자를 찾는 것이다. 인종차별은 백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데 흑인이 피해를 본다.

김씨는 투사 심리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씨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그런 남자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김씨는 부르주아 남자들에게 픽업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계급 의식이 없는 거다. 김씨의 심리는 군가산점을 얻기 위해 싸우는 남자들의 심리와 같다. ‘신의 아들’이라 군대를 안 가는 사람, ‘어둠의 자식들’이라서 가는 사람, ‘아예 사람이 아니라서’ 나처럼 못 가는 사람이 있다.

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보낸 사람과 싸워야 한다. 못 가는 사람하고 싸우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부르주아가 그렇게 싫은 김씨는 부르주아 남성을 비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부르주아 남자를 비판하면 자기가 위험해지니까 안 한다. 그러니까 여성을 비난한다. 그의 ‘중산층 여성 혐오’는 계급 혐오가 아니라 여성 혐오다.


△7월15일 창비와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공동 주최한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헌법과 사회구조의 비판적 성찰' 심포지엄에 참여한 정희진씨.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여성단체들은 국가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상담소 운영, 피해·가해자 프로그램 등을 통해 국가정책의 하부 집행자가 됐다.

여성운동의 힘으로 대표성을 갖는 여성부 장관이 큰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여성운동은 어떻게 가야 하나.

= 여성부나 여성운동단체에 물어볼 일 아닌가. (웃음) 법이나 제도를 만드는 것은 여성운동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전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법이 있어도 간통·낙태·성폭력 등 ‘무늬만 불법’인 게 많지 않나. 국가가 법만 제정하고 돈을 안 쓰는 면도 있다. 여성운동이 그 법을 지탱하고 보완하는 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처지다.

남녀 조화 깨는 건 페미니즘 아닌 가부장제

“여성주의가 중요한 것은 성차별이 가장 중요한 모순이어서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당신의 견해는 너무 앞서나가는 것 같아 세상이나 남성들과 타협하기 어려워 보인다.

= 남녀의 조화를 깨는 것은 가부장제이지 페미니즘은 아니다.

‘남성과 조화로운 페미니즘’을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장애인·이주노동자·레즈비언과 조화로운 페미니즘은 안 되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자주 싸우는 것 같다. (웃음) 내가 지니는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자극이 된다거나 재미있다고 하는 이들이 많아서 반갑다.

모든 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도 없고,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없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지만, 한 번 페미니스트는 영원한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어떤 때는 계급 의식이 없는 페미니스트보다 젠더 의식이 없는 마르크시스트와 얘기하는 게 더 편할 때도 있다. 남성들한테는 상처를 덜 받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