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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논문]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by eunic 2005. 10. 17.
http://blog.naver.com/left_nomad/100012119484

* 이 글은『한국여성인권운동사』(한국여성의전화연합 편, 한울아카데미, 1999) 제 5장의 내용으로서 지면 관계상 주(註)와 참고 문헌을 뺀 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 한국 기지촌 여성운동사, 1986-1998


정 희진1)


1. 들어가며

2. 기지촌, 다시 나올 수 없는 곳

3. ‘현장’ 출신 기지촌 여성운동가들

4. 두레방의 시작

5.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

6. ‘기활’ - 기지촌 여성운동과 학생운동

7. 빵과 허브 - 탈 매춘 전업 사업

8. 기지촌 여성의 아메리칸 드림 - 송종순 사건

9. 윤금이를 둘러싼 정치학

9-1. 처참한 죽음

9-2. 18개월간의 투쟁

9-3. 윤금이, 양공주에서 민족의 상징으로

9-4. 윤금이 투쟁의 성별 분업

10. 기지촌 여성운동의 미래



1. 들어가며


1958년 한 일간 신문은 당시 우리나라의 매춘여성이 30여만 명이라고 보도하였다. 그 중 내국인을 상대하는 매춘여성이 40.9%, 유엔軍을 고객으로 하는 소위 ‘양공주’가 59.1%를 차지하고 있다.2) 현재 시점에서 보면, 외국군 상대 매춘여성의 비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미군이 주둔한지 50년이 넘는 지금 기지촌은 어떻게 변모하였으며 기지촌 여성과 기지촌 여성운동의 상황은 어떠한가.


해방 이후 가족법 개정 투쟁을 제외하면, 우리사회에서 여성운동이 ‘전체’ 민족민주운동과 차별성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여성의 고유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의 여성문제를 성별적(gender)인 관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독자적인 여성운동 조직체들이 80년대 초, 중반에 창립되었다.(1983년 여성의전화/여성평우회, 1984년 또 하나의 문화 창립) 한국사회에서, ‘전체’ 사회운동의 구도 속에서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왔다.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은 이제까지 ‘여성운동은 민족민주운동의 분열 혹은 기껏해야 전체 운동의 부분이며, 부차적인 사회문제, 여성운동은 중산층 부르조아 운동’이라는 비판에 끊임없이 시달려왔다. 게다가 민주화운동(사회운동) 내부의 성별 분업과, ‘전체’운동도 하고 여성운동도 해야 하는 이중 부담은 여성운동가들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춘 여성운동은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주변적이다. 그간 한국의 여성운동은 매춘 문제에 대한 관심, 여력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춘 여성운동은 ‘주변부의 주변부’로서 매우 열악한 상황에 있다.(이 책 민경자의 매춘여성운동사 참조) 어느 여성운동가의 고백대로, “우리는 페미니스트이면서 직장 여성, 이혼 여성, 성폭력 피해 여성일 수는 있어도 매춘여성일 수는 없었다.”


이 글에서 기지촌 여성이란 주한 미군 주둔 지역에 살고 있는 여성들 중 매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말하며(뒤에 상술), 기지촌 여성운동이란 현장 출신 여성운동가를 포함하여 기지촌 여성운동가들의 기지촌 여성을 위한 제반 활동을 말한다. 매매춘 산업 중에서도 가장 천시되어 맨 나중에 하게 되는 매춘이라는 뜻인 ‘막창 인생’ 기지촌 여성들. 일반(국내) 매춘여성들조차 기지촌 매춘여성에게는 ‘우월감’(?)을 갖는다. 외국 군대에 몸을 파는 ‘양갈보’로서, 우리 사회의 성원권(成員權)을 가질 수 없었던 기지촌 여성의 삶은 그래서 더욱 오랜 기간 정치화, 사회운동화 되지 못했다. 사실 기지촌에서 ‘운동’이 전개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지촌 여성운동은 매매춘 문제 자체의 복잡성과 해결의 어려움, 외국군의 주둔, 분단, 군축, 인종, 지역, 계급 문제, 사회운동권의 무관심이라는 겹겹의 어려움을 안고 있다. 기지촌은 군사주의와 매매춘, 외군 군대의 주둔과 분단의 핵심 코드다. 분단 상황은 군사주의를 정당화하고 그에 기반에 가부장적 성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1998년 추경(追更)예산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방 예산은 전체 예산의 21.3%(96년에는 22%)였다. 국가 예산의 1/5 이상을 군사비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여성 관련(부녀)복지 예산은 전체 예산의 0.01%(92년)~0.02%(93~95년)에 불과하고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군사주의, 전쟁과 증오, 분단은 여성 억압을 기초로 유지되고 있다. 군사주의는 폭력적인 남성성을 미화하며 성적인 이미지(sexual image)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기지촌은 한국사회 뿐 만 아니라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모순과 억압을 응축한 공간이다. 기지촌 여성운동은 인권과 평화라는 새로운 세기의 화두를 어떤 방식으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며, 여성 인권에 대한 성찰 없이 인권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이 대부분 남성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반면, 기지촌 (지역)운동의 경우는 애초부터 여성들의 주도로 시작되어, 기지촌 여성의 이슈를 중심으로 활발히 일어났다. 기지촌 여성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두레방이 개원한 1986년부터 본다면, 전두환 정권 시절인 86년 당시 우리사회에서 반미나 미군기지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또 남성 중심적인 반미운동은 기지촌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그 속에서 가장 고통 당하는 여성을 중심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지촌 운동은 여성운동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고, 여성주의 시각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우리사회에서 기지촌 운동은 곧 기지촌 여성운동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기지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매매춘 지역이라는 성차별적(gender)인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기지촌 지역운동을 하는 남성운동가들은 대체로 자신을 기지촌 활동가라기보다는 반미운동가, 지역운동가라고 정체화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매매춘(국내 매춘) 현장 중에서 가장 열악한 기지촌에서 매춘여성운동이 가장 활발히 일어난 것도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운동이 소위 민족민주운동과 맺는 관계를 설명해준다.(뒤에 윤금이 사건에서 상술) 남녀를 불문하고 기지촌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기지촌 문제를 여성문제라기보다는 반미문제로서 인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기지촌 여성운동이 조직 운동의 차원에서 시작된 1986년부터, 현재(1999년 4월)까지 기지촌 여성운동사이다. 미간행 원고를 제외하면, 그간 기지촌 여성운동에 관한 글은 주로 윤금이 사건을 다룬 것으로서 남성 시민운동가 이교정(1995), 재미(在美) 페미니스트 김현숙(1998)과 문형선(캐더린 문,1998)의 연구가 있다. 기지촌 여성을 소재로 한 소설로는 안일순의 ‘뺏벌’(1995)이 있다. 안일순은 92년 윤금이 사건을 계기로 기지촌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여성주의 작가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시, 소설 등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고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안일순은 기지촌 여성운동가 김연자와 함께 군사주의와 여성, 군대와 매매춘 관련 국제 세미나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교정은 한국과 같이 사회적 억압이 심한 사회에서는 시민운동조차 민족민주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그 예로 윤금이 사건이 동두천市 시민운동과 같이 언급된 경우이다. 김현숙은 기지촌 여성운동에서 기지촌 여성, 중산층 페미니스트, 남성 민족주의자의 정치학이 같이 않음을 주장하면서 기지촌 여성이 ‘스스로 말하게 하라’고 주장한다.


이 글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기지촌 여성운동가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으로서, 현장(매춘여성) 출신 운동가들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1986년부터 기지촌에서 활동해 온 여성운동가들은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로서 현장에 투신한 경우이다. 이 글은 이들 여성운동가의 관점에서 이들의 기지촌 여성운동에 대한 고민과 문제 의식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때문에 기지촌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매춘여성 출신 현장활동가들의 목소리를 거의 드러내지 못한 한계가 있으며 이는 이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 둔다.


2. 기지촌, 다시 나올 수 없는 곳


현재 이남(以南)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가 어느 곳에 몇 개인지 정확히 알기는 매우 힘들다. 1992년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모태가 되어 만들어진 ‘주한미군 범죄 근절 운동본부’와 ‘우리 땅 미군 기지 되찾기 전국 공동 대책위원회’ 등 관련 단체들조차 미군기지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 기밀, 군사 기밀에 해당한다고 하여 정부나 주한미군 관계 당국으로부터 자료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8년 현재 이남의 미군 기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전국 주요 도시와 충남 당진의 망일산, 경기도 화악산, 제주도 송악산 등 총 96여 곳으로 추정된다. 주한미군은 지속적인 감군(減軍)으로 지금은 36,450명의 미군이 근무하고 있고 미군 기지와 기지 시설 면적은 총 8.034만평에 이른다.(정유진,김동심:1997) 이는 1997년 ‘주한미군 범죄 근절 운동본부’가 국정감사 자료에 근거하여 밝힌 것이다. 1990년 동아일보 특별취재반의 자료로는, 이남의 미군 기지 면적은 약 1억 만평으로서 이는 임야, 전답을 제외한 대지 면적으로만 보면 전체 남한 땅의 17.7%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한국인의 주거 면적(1억 2, 800만평)에 버금가는 땅을 한국 정부의 경제적 지원 아래 미군이 무상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부산민족민주연합 外:1991) 1960년대부터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 미국 내 반전운동, 소련 핵 전력의 증강, 미국 경제력의 상대적 악화 등의 영향으로 주한미군 철수설이 나돌았다. 1969년 7월 25일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괌 독트린’(닉슨 독트린)을 발표, 박정희 정권을 불안에 몰아넣었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라는 말로 압축되는 괌 독트린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말에 약 6만 2천명이던 주한미군은 71년 3월, 2만 여명이 철수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감군과 보강(80년대 레이건 정권 때)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강성철:1988)


어느 시대, 사회에나 매매춘과 매매춘 집결지는 있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현재와 같이 매매춘이 구조화, 정책적으로 번창하게 된 것은 일제 시대의 식민지 정책과 한국 전쟁, 미군의 주둔 때문이다. 외국 군대의 주둔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매매춘 지역을 만들고 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근대 한국 매매춘의 역사적 뿌리와 대중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공창(公娼) 정책이다. 일본은 조선을 침입하면서 자국의 매춘여성을 데려와 조선사회에 유곽을 형성하고 점차 확대시켰다. 이에 국가는 1910년 ‘유곽법 창기 취체 규정’이라는 매매춘에 관한 법을 만들어 공창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후 1916년 일제는 경무총감부령으로 ‘유곽업 창기 단속 규정’ 실시하였다.(강영수:1988) 일본의 對조선 공창 제도의 핵심은, 매춘업 국가 허가(公許)제와 매춘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제도 실시이다. 일제는 자국내와 조선내 일본인 거류지에는 따로 유곽을 설치했지만, 조선에는 주택가에 산재한 매춘업소를 공인함으로써 결국 조선사회 전반에 매매춘을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山下英愛:1992)


공창 제도 확립 과정에서 매춘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가 일관되게 중요시 된 것은 성병 예방이나 매춘여성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성적 도구’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매춘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데 있었다. 현재 기지촌 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 제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성을 사는 사람에게는 성병 검사를 하지 않고 파는 사람에게만 검진을 의무화, 강제하는 것은 실제 성병을 전혀 예방할 수 없다. 이 같은 성병 정책의 이중성은 미군의 AIDS 예방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지촌 여성들은 에이즈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매춘(買春)을 하는 남성들에 대한 성병 검사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미군 당국과 한국 정부가 기지촌 여성의 에이즈 검사를 확인하듯이, 기지촌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검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해방 후 미군이 새로운 점령군으로 주둔하면서 기지촌에는 미군과 기지촌 여성, 그들을 고객으로 하는 서비스산업이 어우러져 상권을 형성하였다. 외국인 전용 술집,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을 거래하는 블랙 마켓(black market), 암달러상, 포주, 미장원, 세탁소, 양복점, 양품점, 사진관, 기념품점, 초상화점, 당구장, 국제결혼 중개업 사무소, 번역소 등을 무대로 기지촌 문화가 정착하였다.(김현선 외:1997)


부산의 서면 일대의 소위 ‘히야리아 부대’(Camp Hialeah)와 해운대의 탄약부대, 범일동의 미 55보급창, 초량동 지역과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 평택군 송탄읍 신장리(현재는 市), 부평 등은 대표적인 후방의 기지촌 도시였다. 포천, 동두천, 의정부의 뺏벌, 파주의 용주골, 문산의 선유리, 서울 용산의 미 8군 기지, 이태원, 후암동 등도 기지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뺏벌은 기지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뺏벌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뜻으로 경기도 의정부시 캠프 스탠리(Camp Stanley)주변의 기지촌 매매춘 집결지를 말한다. 뺏벌은 의정부 시내 버스를 타면 정거장 이름으로도 표지 된, 이 지역에서도 공식화된 지명이다. 현재 지방의 옛 기지촌들은 단속이 심한 서울을 피해 내려간 국내 매매춘 업주들이 정착하여 국내 매매춘 집결지로 유명하다. 매매춘 업소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포주들은 매춘여성을 감시, 통제하기 쉽고 행정당국은 단속하기 쉽기 때문이다. 매매춘 집결지는 다른 사회와 구분되어 매춘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한국 정부와 미군 당국의 통제는 1950, 60년대 보다 70, 80년대가 더 심했다고 한다. 50, 60년대 한국 정부는 기지 내 매매춘 문제를 일차적으로 미국의 문제로 보았다. 70년대처럼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전후의 극심한 가난은 한국 정부나 일반 국민들이 기본적으로는 매춘여성을 비난했지만 일정 정도 공감하고 동정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60년대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한국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계기가 되었고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미국은 주한 미군에 관한 협상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Moon:1998)


그러나 베트남과 아시아의 전쟁 상황으로부터 미국의 이탈을 의미하는 닉슨 독트린과 아시아 주둔 미군의 지속적인 감소는 상황을 역전시켰다. 주한미군의 감군은 곧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위기를 의미했다. 주한미군은 한국 정부에게 기지촌의 환경 개선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간의 흑백 갈등, 미군과 한국인간의 인종적 갈등, 미군 병사들에게 만연한 성병, 기지촌 시설의 비위생적인 상태, 밀수 등에 공동대처하기 위해 주한미군과 한국정부는 1971년부터 1976년까지 ‘군기지 정화 운동’을 벌이게 된다. 1971년 여름 미군들끼리 인종차별로 인해 싸움이 났을 때, 미군 당국이 이를 중재하는 과정에서 미군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지촌 여자들이 매우 더럽다. 우리는 한국을 구하러온 VIP들인데 대접이 너무 소홀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기지촌 여성들을 관리하게 된다. 기지촌마다 성병 진료소를 만들고 매주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게 하였다. 기지촌 여성에게는 보건증이 주민등록증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정부가 기지촌 매춘을 직접 관리, 단속하게 되면서 정부는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민들레회’와 같은 관제 자치 기구를 조직한다.(김현선:1998)


정부가 매매춘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군의 건강을 위해 기지촌 여성들을 관리, 통제하는 것은 매매춘에 대한 이중 정책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기지촌 여성들을 ‘가장 더러운 여자들’로 낙인찍으면서도 동시에 ‘외화를 버는 애국자들’, 심지어 ‘민간 외교관’이라고 칭송(?)하였다.


기지촌 매춘 여성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지촌 매춘 여성 중 클럽에서 일하는 성년 여성들만 성병 검사 대상이기 때문에, 이들만 공식 통계에 포착된다. 일명 ‘뜨내기’(국내 매춘을 겸하는 유동적인 매춘 여성), ‘전화발이’(여관 등에 대기하다가 전화로 호출받고 매춘하는 여성), 미성년 매춘여성, ‘히빠리’(나이 들어 매춘업소에 고용되지 못하고 거리에서 직접 손님을 잡아 매춘하거나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 미군과 계약 동거하는 여성의 숫자를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해방 후 기지촌 매춘여성의 총 인구를 25만에서 3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김현선:1998) 현재는 보건소에 등록된 여성들의 경우 최소 5,000여명에서 최대 18,000명으로 추정하며 그 외 약 9,000명의 여성들이 클럽 바깥에서 매춘을 하고 있다고 본다.(한국여성개발원:1992, Margo:1997, Sturdevant & Stoltzfus:1995, The Coalition Against Trafficking in Women Asia Facific의 연도불명 자료)

3. ‘현장’ 출신 기지촌 여성운동가들


조직적 차원에서 기지촌 여성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은 1986년 3월 17일 의정부시 가능동에 ‘두레방’이라는 단체가 생기면서부터 이다. 하지만 기지촌 여성운동은 1970년대부터 송탄과 군산 기지촌에서 활동해 온 김연자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김연자는 1964년부터 1989년까지 25년간을 기지촌 매춘여성으로 살아온 소위 ‘현장’출신의 여성운동가이자,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기지촌 여성운동가이다. 그 동안 각종 여성인권대회, 학술대회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삶을 증언하였다. 그녀는 그 동안 한 번도 가시화 되지 않았던 기지촌 매매춘의 실태와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세상에 알렸다. 현재 알려진 대부분의 기지촌 여성 관련 증언과 생애사(life history)는 김연자의 증언과 두레방 활동에서 채록된 상담 기록에 의한 것이다. 정신대 문제의 최초의 증언자가 故김학순 이었다면 ‘현대판 정신대’라는 기지촌 있어서는 그녀가 최초의 증언자이다.


그러나 그녀의 활동은 ‘증언자’적 존재를 넘어선다. 그녀는 한국사회에서 기지촌 여성이 다루어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기지촌 여성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 동정하는 것, 반미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하는 것, 제국주의 침략의 가장 큰 희생자로 보는 것에 모두 반대한다. 오히려 그녀는 한국 사회 내부의 가부장제와 계급 문제를 비판한다. 사회운동권과 여성운동 세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기지촌 여성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주체화되기를 원한다.

“내가 기지촌에서 25년을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이(여성운동가) 찾아온 적이 없었어요. 현장의 목소리, 현장을 와보지 않고 어떻게 여성문제를 풀어갈 수 있겠어요. 여성운동. 나는 그것이 뭔지 모르지만 주연은 여성운동가고 조연, 엑스트라는 현장여성들인 것 같아요. 우리는 임상실험용 개구리나 자료거리가 아니예요. 기지촌 여성들을 연구 자료에 쓰려고만 하지 정작 중요한 개선책에는 얼마나 노력해 주었나요?” 안일순(1993), “기지촌 생활 25년 김연자씨의 본격 증언 - 내가 겪은 양공주, 미군범죄의 세계” 월간 말지 1993년 12월호3)

그녀는 우연히 기지촌 여성들에게도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 자치회가 실제 기지촌 여성들의 권익을 대변하기는커녕 ‘합법적인 착취 기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치회를 개조하기 위해 직접 나서게 된다. 자치회는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직선제로 운영되는 경우도 있고 포주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는 정부의 자금 지원 하에 운영되어 지역 유지와 포주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용이하게 통제하기 위한 기구였지만, 조직구성원의 성격, 회장이 누구냐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의 진정한 자치 기구가 될 수도 있었다. 70년대 동두천 지역의 자치회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직업 훈련을 조직화하기도 했고 기지촌 여성자치회 전국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1971년 송탄에서 미군들이 화대와 기지촌 물가가 비싸다며 신발과 숏 타임(short time) 화대를 5불로, 롱 타임(long time) 화대를 10불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미군들의 화대 떼먹기와 화대 인하 요구에 대항하였다. 천 명이 넘은 동료 매춘 여성들을 조직하여 ‘우리는 신발이 아니라 인간이다.(We are not shoes! We are human beings!)’를 외치며 미군 부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살벌했던 유신 시절, 기지촌 여성들의 작은 권익을 찾기 위한 노력조차 ‘북한과의 연계’로 몰려 그녀는 경찰서에 끌려갔다. 이 때 당한 협박, 구타, 고문의 경험은 그녀에게 더욱 큰 좌절과 울분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오랜 기간 자치회 활동을 하면서 포주와 미군들의 잔인한 폭력, 살인 사건이 아무런 처벌 없이 지나가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1976년부터 그녀는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군산은 송탄이나 동두천의 기지촌과는 달리 기지촌 여성에 대한 통제가 심했던 곳이었다. 민간인과 기지촌 여성이 한 동네에 살았던 다른 기지촌과는 달리, 기지촌 여성들을 방 번호가 붙은 소위 ‘닭장 집’에 집단 수용해놓고 집 근처에는 높은 담을 치고 경비가 지켰다. 일명 ‘실버 타운’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정부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50%지원하고 포주가 50%를 투자한 실제 주식회사 형태의 ‘여자 파는 회사’였다. 그녀는 그 때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는데, 드러나지 않은 ‘윤금이’들이었다.


1977년 6월 12일 동료 이복순(당시 25세)은 목에 안테나 줄이 감긴 상태에서 불에 타 숨졌으며, 한달 뒤 옆방에 살던 이영순(당시 28세)이 칼에 찔려 숨졌다. 당시 자치회 회장을 맡고 있던 김연자는 이복순이 죽었을 때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범인을 못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영순의 시체를 발견하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그때까지 수많은 기지촌 여성들이 미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제대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범인은 미 공군 스티븐 웨렌 타워맨(Steven Warren Towerman, 당시 20세)일병으로 이복순과 이영순을 연이어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스티븐은 이영순 살해만 인정하고 이복순 사건에 대해서는 끝내 부인하였다. 그는 주한미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타운 안의 여자들이 물에 빠져죽고, 연탄가스에 중독 되고, 불에 타죽는 등 열 명 이상이 연달아 죽음을 맞이하였다.


동료들의 줄 이은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면도날과 맥주병으로 자해를 일삼던 홍순덕(가명, 당시 24세)과 함께 있는 돈을 모두 털어 타운 근처 공터에 천막을 치고 일종의 쉼터를 만들었다. 그녀는 천막 안에 ‘백합선교회’를 만들어 매일 밤 기지촌 여성들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고 서로 고통을 나누었다. 마을 주민들이 여자들의 통곡소리가 시끄럽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천막을 철거하라고 압력을 가했으나 끝까지 버텼다. 이후 그녀는 전북신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전도사가 되어 1989년, 송탄에 ‘참사랑 선교원’이라는 기지촌 여성 쉼터를 마련한다. 혼혈 아동들을 위한 공부방, 어머니 영어교실과 한글교실, 선교 활동을 준비하다가, 92년 8월 학생운동가와 두레방 자원 활동가 출신들이 결합하여 ‘참사랑 쉼터’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원하게 된다. 김연자는 앞으로도 기지촌 여성과 혼혈 아동을 위해 여생을 보내고자 하며 강연과 증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경기도 의정부 뺏벌 지역의 S클럽에서 일하던 서정아(가명, 당시 20대 후반)의 활동은 기지촌 여성들의 주체성과 능동성, 기지촌 여성에 의한 기지촌 여성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S클럽은 의정부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주로 학력이 낮고 청각 장애가 있는 여성들을 고용하여 다른 클럽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주면서 이중 장부를 만들어 착취하였다. 서정아는 포주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동료들을 설득하여 이중 장부에 대해 포주에게 항의하였다. 또한 다른 여성들과 함께 빚 갚기 계를 조직하였다.(기지촌 여성들이 脫매춘하는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빚과 건강 문제이다) 자신은 먹을 것을 아껴가면서 돈을 모아 10명이 넘은 여성들의 빚을 갚아주었다. 이후 여성들이 전업(轉業)하거나 결혼할 때 다른 여성들과 함께 도왔다.(김현선 외: 1997)


일부에서는 김연자나 서정아의 활동을 기지촌 여성들의 ‘자생적’ 투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자생적인 투쟁을 ‘목적 의식적인’ 투쟁과 대립, 분리시키거나 혹은 목적 의식적 투쟁의 전(前)단계로 보는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80년대 한국 사회운동가 일부에서는 사회운동을 자생적 투쟁과 목적 의식적 투쟁으로 분리하여 목적 의식적 투쟁의 우월성,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여성주의는 이러한 사회변혁 모델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의 참여를 봉쇄하고 드러내지 못하는 관점이라고 비판해왔다. 공적 영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사회운동 이론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주변인의 일상적 투쟁을 운동의 주요 영역에서 배제시키게 된다.


기지촌 여성 중에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로 돕고 고통을 나누면서 자신의 매춘 환경에 대해 일상적인 저항을 해가고 있는 제2, 제3의 김연자, 서정아가 많이 있다. 이들의 투쟁을 기존의 ‘주류’ 여성운동권이 어떻게 평가, 연대, 지원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4. 두레방의 시작


1986년 3월 17일, 두레방은 문혜림과 유복님에 의해 개원했다. 두레방은 ‘품앗이, 두레’할 때의 두레로 여성들이 서로 돕는 곳, 쉼터라는 의미이다.(영어 명칭은 My Sister`s Place) 문혜림은 원래 미국인으로 미국 유학 온 한국 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게 된 여성이다. 그녀는 남편(민중신학자 문동환 박사)이 민주화 운동 관련으로 구속되자, 아르바이트로 미 8군에서 국제 결혼한 여성들을 상담한 것이 계기가 되어 두레방을 열게 되었다. 한국인과 결혼한 미국여성으로서, 여성운동가로서 기지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외국 교회 단체의 지원금을 받아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문혜림은 91년 12월 미국에 돌아가서도,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온 한국여성들을 위해 일하였고 송종순 사건(이 글 8. 기지촌 여성의 아메리칸 드림 참조) 때도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종교인(기독인)으로서의 품성과 여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많은 기지촌 여성운동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문혜림은 같이 일할 상근자를 구하려고 여기저기 사람을 알아보았다. 주위에서 모범생 스타일의 여성들을 추천했으나 문혜림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현장 여성들과 친화력이 뛰어난 유복림을 선택하였다. 유복님은 한신대 출신으로 70년대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은 교회활동가이자 뛰어난 여성운동가였다. 두 사람의 상근자를 갖춘 두레방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산하의 특수선교센터로 출발하게 된다.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교회여성들의 투쟁과 노력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교회 여성들은 70년대부터 정신대, 매매춘, 여성노동운동, 빈민운동, 반전, 반핵 운동,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정신대, 매매춘 문제는 교회여성들의 선구적 노력에 의해 확산된 경우다.4) 두레방 역시 교회여성운동의 힘으로 시작된 단체다. 두레방은 기지촌 매춘여성들과 국제 결혼한 여성들이 스스로를 해방하며,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을 선교적 사명으로 하였다.(회지 창간호에서 인용) 초기 후원자들은 거의가 교회여성들이었다. 개별 교회, 지방 여신도회 회원들과 이우정, 이희호, 김경희, 박순금, 박용길 등 당시 교회여성운동의 지도자들이 거의 모두 참여하였다.


여러 교단 중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민중신학의 근거지로서 진보적 교단으로 유명했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매춘여성을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한 교회는 없었다. 기지촌에서 교회를 운영하는 대부분의 (보수적인)목회자들은, 매춘여성을 회개해야 할 죄인으로 취급하고 죄의식과 열등감을 설교하였다. 심지어는 어떤 목사는 매춘여성은 가장 죄를 많이 지은 인간이므로 가장 많은 헌금을 내야 한다며 가난한 매춘여성들에게 십일조 헌금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두레방을 의정부 지역에 세운 것은 의정부와 동두천이 대표적인 기지촌으로 기지촌 여성의 수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또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가 용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레방은 처음부터 선교적 사명과 동시에 매춘여성운동, 제 3세계 인권운동, 여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여성의 문제... 우리나라 여성들 뿐 만 아니라 미국의 여성들도 손잡고 노력해야... 한국과 미국의 교회 교육이 필요합니다. 제 3세계 인권문제, 특히 매춘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 특히 미군 기지가 있는 제 3세계의 운동가들과 자료를 주고받으며 공동 대처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현장 출신의 실무자 양성을 위해 애씁니다.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통하여 의식화된 여성 실무자야말로 이 일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두레방 회지 1호 중에서)

두레방의 주요 사업은 상담, 영어교실, 공동 식사, 탁아, 脫 매춘을 위한 전업(轉業) 사업, 기지촌 활동이었다. 그 동안 대부분의 기지촌 여성들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을 만한 대화 상대자가 없었다. 이들을 ‘인간‘으로 존중하며 동등한 처지에서 얘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지촌 여성들이 무시와 천대, 감시, 주눅, 자기 학대, 자포 자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여유와 공간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레방 활동 초기에는 두레방을 찾아오는 기지촌 여성들을 포주들이 가둬놓고 때리거나 협박했기 때문에 기지촌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두레방 활동가를 만나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기도 하였다.


두레방의 프로그램 중 특히 상담은 기지촌 여성들이 자신을 객관화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상담을 통해 인간적인 관계와 교류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경험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했다. 자신의 한 많고 기구한 인생이 순전히 자신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들은 자기 존중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단 자기도 타인에게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두레방의 회원들은 일반 여성운동 단체처럼 회비를 내고 활동하는 회원이 아니라 두레방과 연계를 맺고 도움을 주고받는 여성들이다.


영어교실은 영어를 몰라 미군들에게 화대를 떼이는 등 불이익을 방지하고, 국제 결혼한 여성들이 남편과 대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미군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도 시도했으나 호응이 없었다. 공동식사는 생계가 막연하거나 식사를 제때 못하는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 식사 준비와 식사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밖에 혼혈 아동들을 위한 공부방, 놀이방 운영과 대학생들의 기지촌 활동, 전업 프로그램으로서 두레방 빵 사업, 기지촌 여성의 삶을 알리는 각종 강연과 회지 발간 등이 있었다.

5.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


두레방은 상담을 통해 기지촌 여성의 삶을 구술하거나 수기를 회지에 실었는데, 그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어느 날 포주가 잘만하면 한 달에 30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빚 때문에 포주에게 꼼짝 못하고 있던 나는 포주를 따라 포항으로 내려갔다. 한 겨울이었는데 언덕 배기에 천막을 친 가건물에 들어가 하루 20-30명을 상대했다. 옛날 큰 훈련(팀스피리트)있을 때 그런 식으로 미군들의 훈련 장소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했다. 나는 그 와중에 임신을 하고 자연유산을 해서 심하게 하혈을 했지만 매춘을 계속했다. 그때 몸을 많이 망쳤다...” - 김현선 (1997), [기지촌. 기지촌여성. 혼혈아동 실태와 사례](미간행). p.61-62


“내 어렸을 때의 첫 번째 기억은 걸레를 짜서 먹던 일이어요. 나를 낳자마자 우리 친부모는 고아원에 보냈는데 저녁밥을 먹고 나면 보모들이 물을 안 주는 거예요. 물을 먹이면 밤에 오줌을 싼다나요... 내가 여섯 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한 일은 갓난 젖먹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는 일이었어요. 보모들이 우유 통을 주고 나가면 아기들이 물고 있던 우유 꼭지를 얼른 떼서 내 입에 넣었지요. 나는 항상 배가 고팠어요.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전라도의 어느 교감 선생님 집으로 입양되었는데 오빠들만 넷인 집안이었어요. 내가 그 집에 가자마자 일하던 가정부와 머슴을 내보내고 모든 집안 일을 내게 시켰어요. 학교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 되었어요. 고아원 때 다닌 국민학교 3학년 1학기가 지금까지 내 학력의 전부예요. 남의 집일도 많이 해주었어요. 그래야 우리 집 일할 때 이웃집 일손을 빌릴 수 있으니까요. 뽕나무 회초리로 수없이 맞았어요. 나는 스물 일곱 먹은 지금까지 몸을 새우처럼 꾸부리고 자요. 방이 많은 집이었는데 나에게는 방이 없었어요. 지금도 반듯하게 누우면 불편해서 잠이 안온 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양)아버지에게 강간당했어요. 엄마가 눈치를 챈 것 같은데 저만 죽일 년 잡듯이 족치는 바람에 서울로 와서 잠바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어요. 그때 둘째 오빠가 제 월급에서 2.000원만 빼고 다 가져갔어요. 나는 20살이 되어서야 월경을 했어요. 2.000원은 생리대 값이었어요. 3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돈은 한푼도 저축하지 못했어요. 그 공장 사장님이 나를 기특하게 보아 자기 운전수랑 결혼시켜줘서 그때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만들었어요.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이미 동거하던 여자가 있었어요. 그리고 걸핏하면 저를 두들겨 패고 뜨거운 국물을 얼굴에 붓고... 저는 갈 곳이 없어 울기만 했어요. 남편은 왜 돈을 벌어오지 않느냐며 성화여서 임신한 몸으로 약을 먹어가며 공장 일을 했어요. 잔업에 철야를 하니까 너무 잠이 와서 약을 많이 먹었는데 정박아 아기가 태어났어요. 남편의 매는 더욱 심해지고 병신 아이를 낳은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어요. 두 달 동안 집에서 부업한 돈 10만원을 아기 옆에 두고 무작정 울며 집을 나섰어요. 여성 월간지에서 본 광고에 잠도 재워주고 월급도 후하다기에 연락하니 어떤 아줌마가 와서 저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더군요.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문산, 기지촌이었어요.” - 두레방 회지 3호 “빌리 엄마 힘냅시다!”중 발췌


“원래 그녀는 방송대까지 다녔고 영어도 브로큰이 아니라 제대로 해서 클럽에서 미군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고등학교 때 가출을 반복했던 사고뭉치 친오빠가 부모님이 없는 사이에 그녀를 강간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깨끗치 못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곳, 자기를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다가 기지촌까지 오게 되었어요. 기지촌에 와서는 클럽보다도 두레방 사람들과 더 친하게 지냈고 직접적인 매춘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미군 병사를 만나 사랑에 빠져 혼인신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 미군은 부대를 그냥 나와서 불법 체류자 비슷하게 되었고, 돈도 벌지 않고 늘 그녀없이는 못산다고 매달리는 사람이었어요. 그때부터 그녀는 서울로 나와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어요. 야무지고 생활력이 강했던 그녀는 이러다가는 평생 그 미군을 먹여 살려야 할 것 같아서 미국에 있는 시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했어요. 시어머니가 자궁암에 걸렸다고 거짓말로 아들을 설득해 귀국하도록 했어요. 그녀는 다시 친정 집으로 들어갔는데 아버지는 앓아 눕고 엄마가 생계를 꾸려 가는데 아파트 분양금, 빚이 많아서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어느 날 아버지가 그녀를 부르더니 돈을 벌어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어차피 너는 그런 몸 아니냐’며 다방을 나가든지, 술집에 가라고 했어요. 그녀는 그날로 집을 나와 다시 기지촌으로 들어와 매춘을 시작했어요. 거기서 미군 유부남을 만나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연애를 했는데. 물론 그 미군은 이혼하겠다고 늘 그녀를 안심시켰지요. 그녀는 미군들 사이에서 누구의 여자로 찍히면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어요. 문제는 그 미군이 한국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절교를 선언한 거예요” - 기지촌 활동가와의 인터뷰에서.


“클럽에서 일하는 동안 가장 큰 문제는 피임이다. 한 번은 8개월 째 낙태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 아이를 보니 사람의 형태를 다 갖추고 있어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낙태를 열 여섯 번 정도 했다. 하지만 낙태를 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임신 중에는 물론이고 낙태한 다음 날에도 다시 매춘을 하는 일이다.” - 김현선 정리(1995), “나의 살아온 이야기” [위대한 군대, 위대한 아버지], 정유진/유태희 공편 (미간행)

기지촌 여성들의 낙태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여성개발원의 조사에 의하면 조사 대상(877명) 기지촌 여성 중 인공 임신중절 경험이 없는 경우는 23.5%, 1회가 40.9%, 2회가 29.1%, 3-4회가 20.5%, 5회-10회가 7.6%, 10회 이상이 1.9%이다.(한국여성개발원:1992) 어떤 여성은 무려 25회의 낙태를 했는데, 그 이유는 ‘튀기’(기지촌에서는 혼혈 아동을 ‘half-person’이라 부른다)를 이 세상에 데려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Margo:1997)

“혼혈아의 엄마인 김신자씨(가명, 38세)는 동두천의 D클럽에서 18만원의 월급을 받아 10만원은 탁아소에 내고 8만원을 가지고 어렵게 생활하는 매춘여성이다. 그녀는 94년 5월 29일 4시에 미군 짚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그녀는 몇 분간 기절했는데 운전을 하던 미군은 그녀가 깨어나자 손에 약 30불(2만원)을 쥐어주고 그냥 가버렸다. 그녀는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고 온 몸에 타박상을 입었다. 그녀는 자신이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가해 미군 찾는 것을 포기했다. 두레방은 사고 낸 미군을 찾고자 했으나 그녀는 거부하였다. 그 동안 기지촌에서는 클럽의 매춘여성들이 미군 범죄를 신고하면, 미군들이 신고한 여성들을 칼로 찌르거나 구타, 강간하고 클럽의 장사가 안되도록 보복해왔다. 여성들이 당해도 포주들은 여성들의 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장사를 망친다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히거나 다른 기지촌에 팔아버렸다. 김신자씨는 이런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두레방 회지 13호 “교통사고도 신고할 수 없다니...” 중 발췌.


“20대 초반 가출한 후 클럽에서 일했다. 같은 클럽의 여성들과 미군 손님을 서로 뺏고 뺏기는 갈등이 있어서 힘들어 하다가, 술에 취한 포주에게 구타당한 다음날 도망쳤다. 빚 때문에 다른 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상담자(기지촌 활동가)와 함께 여관을 전전했다. 이후 제과점 등에서 일했으나 새로운 직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 달을 채우지 못했다. 결국 지금은 한국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힘든 노동을 무척 두려워한다. 상담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부모 잘 만나서 힘든 일 하지 않고도 놀면서 사는데 나는 왜 그럴 수 없느냐, 나도 그런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매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춘을 통해 관계하는 미군들과 연인관계로 믿고 싶어했다. 미군들은 이런 심리를 알고 화대를 지불하지 않고 동거하면서 그녀를 이용했다. 끊임없이 상담자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시달린다. ‘대학을 졸업했다, 부모가 부자였다’ 등의 거짓말로 자신을 다른 기지촌 여성과 구별하고자 한다.” - 97년도 새움터 사업 평가 자료(미간행) 중에서.

그들의 인생 역정은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억압을 드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순의 총 집약이었다. 그들의 삶은 기지촌 여성운동이 여성운동이자 매매춘 근절 운동, 성폭력 반대운동, 지역운동, 빈민운동, 탁아운동, 노동운동, 군축, 반미, 통일운동, 혼혈인의 인권운동이라는 다양하고 복잡한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기본적으로 여성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고정된 여성의 역할(gender)과 이중적인 성(sexuality)윤리가 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착취와 고통을 주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6. ‘기지촌현장활동’ - 기지촌 여성운동과 학생운동


기지촌 여성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재정적, 조직적 도움을 주었던 세력이 교회여성운동이라면, 사안을 확산시키는 데에는 (여)학생운동과의 연대가 큰 역할을 했다. 두레방 활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지촌 활동(이하 기활)과 脫 매춘을 위한 전업(轉業) 사업이다. 기활은 농활(농촌 활동), 빈활(빈민 활동), 공활(공장 활동)처럼 대학생들이 직접 기지촌을 방문, 기지촌 여성단체(두레방, 새움터)의 활동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학생운동의 연대 사업을 말한다. 기활은 90년 여름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처음 시작하여, 92년부터는 서울지역여대생대표자협의회(서여대협)에서 ‘反美사업’의 일환으로 공식 참가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의 대학으로 확산되어 총학생회, 총여생학회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90년부터 98년까지 9년 동안 남녀학생 연인원 2,000여명이 참가하였다.5)

기활은 기지촌 문제를 대학가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기지촌 여성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가시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레방에는 대학생 상대의 원고, 강연 요청이 물밀 듯 들어왔다. 기활을 통해 기지촌 여성운동은 두레방 빵 판매망과 자원 활동가, 후원회원을 모집할 수 있는 중요한 네트 워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현재 기지촌 여성운동가들도 대부분 기활을 통해 기지촌 여성운동을 결심하게 된 경우다.


문혜림, 유복님에 이어 90년부터 기지촌 여성운동을 해오고 있는 김현선(새움터 대표, 前 두레방 사무국장)은 87학번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의 전형적인 세대에 속하면서도 기존 학생운동권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4 학년 때 저는 학생운동을 정리하려고 했어요. 그때는 5학년, 6학년 운동(졸업 후에도 학생운동에 남아 후배들을 지도하거나 서총련, 전대협 등 상층 학생회에서 일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4학년 시작하자마자 활동을 그만두니 굉장히 욕먹었죠. 저는 선배들이 졸업 후에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사는 데 많이 실망했어요. (노동)현장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고, 금방 아무 생각 없이 시집가고... 저는 평생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꼽아보니까 아무래도 여대 다니다 보니, 여성운동이 어떨까 싶었어요. 4학년 봄에 우연히 한겨레신문에서 김미경 기자가 쓴 두레방에 관한 기사를 보았고, 억압받는 여성들이 희망을 갖고 산다는 데 너무 감명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두레방에 찾아가서 자원활동을 했고 그해 여름에 학생회 라인을 이용해서 복님 언니랑 의논해 5주 동안 기활을 처음 시작한 거예요. 당시에는 여대인데도 여성문제에 관심 있는 애들이 별로 없었어요. (여성운동은)시시하다. 왜 노동운동을 해야지 그런 걸 하냐는 거죠. 학생운동 하면서 여성문제에 관심있는 애들, 운동권은 아니지만 착하고 양심적으로 살려는 애들이 주로 참가했고 호응이 대단했어요”

기활에 참가하게 된 학생들의 동기와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여학생과 남학생, 대학의 소재 지역, 각 대학 기활의 역사, 여성의식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다. 기활에 참가하기 전에 학생회 차원에서 실시하는 사전 교육은 전반적으로 반미에 대한 내용이 강조된다. ‘숟가락이 부러져도 미국 때문’이라는 식으로 모든 문제를 미국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 교육 자료집을 만드는 사람들은 학생 운동가인 반면에 실제 기활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소위 일반 학우들인 경우가 많다. 학생운동에서 반미운동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선언적이기 때문에, 사실 기지촌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을 통해 반미를 고민하는 학생운동가들 자체도 극소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학생들은 반미의 차원에서 기활에 참여한다. 때문에 학생들은 같은 매춘운동단체지만 ‘한소리회’에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하지만 기활에 참가하는 학생들 대다수가 여학생들이고 남학생들은 주류 학생운동권이 아닌 상대적으로 착하고 순한 ‘여성적인’ 학생들이다. 이들은 모두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은 경우이다. 이들은 반미 문제 외에는 기지촌 매매춘 현장에 접근할 어떤 개념 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기활에 참가하는 이유를 제대로 정식화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자대학과 기활 경험이 많은 대학을 중심으로 기활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에 대해 스스로 문제 제기하는 학생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일상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것, 여성문제를 분리하지 않으면서 90년대 초반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농활에 비해 기간은 짧지만 기활은 참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제까지 창피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성(sexuality)이 기지촌에서는 적나라한 일상이 되고 공론화 되는 것을 경험한다. 남녀 학생 모두 기지촌 여성들 앞에서 위선적인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성폭력 (피해, 가해)경험 등 이제까지 성과 관련한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기지촌 여성들에 돕는다, 교육하러 왔다가 오히려 자신과 우리사회의 모습을 배우고 여성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일종의 여성의식향상 경험을 하게 된다. 기활 프로그램은 우리사회의 성문화와 여성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대중운동이 되었다. 기활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에게 기활은 대학생활 중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사실 우리사회의 반미운동, 민족주의 운동에서 기지촌이라는 현장은 별로 주요하게 간주되지 않는다. 미군 범죄에 대한 관심조차 ‘거시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놓쳐버리는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80-90년대 대학가에서 그토록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반미 운동,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의 성과가 기지촌 여성운동의 역량 강화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사실 80년대 학생운동세력은 두레방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래서 기지촌 여성운동의 현장은 반미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에도, 소위 ‘여성운동이 떴다’는 90년대에도 여전히 열악하다. 이러한 관점은 여대생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초 중반 들어 여학생 운동을 학생 운동이라기보다는 대학내 ‘여성’운동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아직 전국적이지는 못하다.

“여학생 운동은 부분 계열 운동... 45년 이후 미제가 남한을 강점하면서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분할 통치를 고안했고, 이중 하나가 여성임을 구실로 하여 순종적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여학생들은 20대 초반이기 때문에 양키 퇴폐 문화의 부산물인 인신매매, 성폭행의 위협에 노출되어...” 6)

“우리는 종종 우리사회가 미국에 의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좌지우지 당하는 식민지임을 잊게 되지만 기지촌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지촌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눈길에서 출발해 민족사랑의 마음을 배워오고 주한미군들의 악랄한 만행을 통해 미국 놈들의 본질과 반미가 왜 이시대 최고의 애국인지를 배워옵시다.”7)


이들처럼 아직도 일부 학생운동 세력은 (여성학이 대학 내에서 어느 정도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90년대 후반에도) 한국사회의 가부장제, 인신매매, 성폭력이 ‘미 제국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는 92년 윤금이 사건 진행 과정에서도 첨예하게 드러났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저명한 한국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1967년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그는 ‘미국 남자’의 당연한 권리로서 ‘한국 여성’의 성적 서비스를 권유하는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묘사하면서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던 경험을 기술하였다.8) 호텔에 투숙할 때, 영어 강사 할 때, 미군 부대를 방문할 때, 연구를 위해 현지조사 갈 때 등등 가는 곳마다 “여자가 필요하지 않느냐, 여자를 불러다 주겠다”는 한국인, 미군들의 강권을 받았다. 그는 유교적 형식주의(Confucian formalism)가 강한 한국에서 왜 그토록 향락, 외설 문화가 번창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한국과 미국의 종속 관계를 남녀의 성적 종속 관계에 비유했다.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과 미국은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될 것이며 ‘언제든지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한국 여성(available women)’을 놓고 미국과 일본의 남자들이 더 많은 화대를 지불하겠다고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보았다. 강대국은 남성이고 약소국은 여성이기 때문에, 두 나라가 평등해진다면 매매춘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동양, 제3세계, 약소국을 여성화(feminize)하는 이 같은 견해는 진보적 남성들이 기지촌 매춘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을 대변한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운동가,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은 위와 같은 관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민족 모순이 없다는 게 아니라 문제는 통일이 되어도 이 여성들(기지촌 매춘여성)이 혜택을 보겠느냐, 매춘이 없어지겠느냐 지요. 반미에만 초점을 맞춘 (남자)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우리가 도움 받은 것도 많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기지촌 여성운동이 ‘매춘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지촌 매춘과 국내 매춘의 차이가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필리핀 사람들이 미군기지 반환 운동을 열심히 해서 기지가 없어진 대신 더 큰 향락산업이 생겼는데 저는 우리도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미군이 철수한다고 이 여성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70년대 미군 철수 반대 데모를 기지촌 여성들이 벌인 것도 당장에 이 여성들은 미군이 철수하면 생존의 근거지를 잃게 됩니다. 기지촌 여성문제는 우리사회의 매춘문제부터 해결해야 돼요” (기지촌 여성운동가와의 인터뷰에서)

“ ...그녀는(김연자) 반미 주장에 기지촌 여성을 연결시키는 사람들을 대할 때 흥분한다. ‘미군은 나쁘고 양공주는 불쌍하다’ 그러한 단세포적 시각으로 미군 범죄를 보면 논리의 비약을 가져온다... 공녀로, 데이신따이로, 닷지로, 아이코로, 티나로 여자들을 이민족에게 바치는 동안 조선의 사대부들은 안방에서 처첩을 거느리고 아내를 때리지 않았는가? 자신들은 군대가기 전에 딱지 뗀다고 사창가로 몰려가면서 첫날 밤 신부의 처녀막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영계니, 회춘에 몸보신에 극성인 남자들, 딸이고 처제고 어린이고 가리지 않고 겁탈하는 그들의 정력... 조금 잘 살게 되었다고 태국으로 괌으로 국제매춘의 대열에 선 남자들...기지촌을 배태시킨 구조적인 문제에 앞서, 케네스 마클(윤금이 살해범)에게 돌을 던지기 앞서 나는 이 나라 남자들이 먼저 눈뜨기 바란다.”9)

7. 빵과 허브 - 탈 매춘 전업 사업

두레방은 1989년 10월부터 기지촌 여성들의 탈 매춘을 위한 전업사업으로 빵 사업을 시작한다. 매춘여성운동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매춘여성이 매춘을 그만 두고 다른 직업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다. 매춘업(賣春業) 자체를 죄악시하고 매춘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면서 여성들을 강제 수용하는 기존의 정책은 탈 매춘 정책이 아니라 매춘여성 처벌 정책이었다. ‘윤락여성의 사회복귀를 위한 지원방안 연구’(한국여성개발원:1992), 이 제목은 우리사회의 매춘여성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매춘업(賣春業)을 윤락(淪落)으로 표현, 도덕적 기준으로 가치 평가하면서 탈 매춘을 사회복귀로 보고 있다. 매춘여성을 사회로 ‘복귀’시킨다는 의미는 이미 매매춘 지역을 우리사회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매매춘 지역은 사회가 아닌 것이다. 매매춘 지역을 우리사회로부터 단절하고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여성)들에게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매매춘 지역에서는 아무리 끔찍한 인권 유린 사태가 일어나도 ‘사회’와 똑같은 기준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그 여성들은 그런 걸 각오하고 사는 게 아니냐’, ‘거기는 원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


기지촌 여성운동가들은 탈 매춘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비판한다. 두레방은 빵 프로그램에 당시 40대 후반의 기지촌 여성을 노동자로 고용하고 이후 현장 여성 3명을 더 고용했다. 순 우리밀로 만든 무방부제 빵과 과자를 교회와 학생회를 중심으로 판매하였다. 우리 사회 최초의 매춘 여성 전업(轉業) 프로그램이었다. 상근 실무자들은 공동식사, 상담, 공부방, 놀이방 등 일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직접 빵을 들고 수요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판매망을 개척했다. 주로 교회에 아는 사람을 중심으로 판매했기 때문에 일요일도 없었다. 안정적인 판매망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매춘여성들이 만든 빵이니까 더럽다고 안 먹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두레방은 노태우 정권의 사찰과 상근자 들에 대한 구속 위협, 야간 수색 등 탄압을 받고 있었는데, 그 표면적인 이유는 빵공장이 불법(식품위생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은 빵 만드는 현장 출신 여성에게 금품을 주어 정보를 캐내는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시켰다. 경찰은 ‘두레방 실무자들이 통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가, 미국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가’를 묻고, ‘대학생들이 와서 무슨 일을 하고 가는가’ 등을 조사하였다. 이후 이 여성은 두레방 상근자들과 신뢰가 생기면서 프락치 활동을 그만두었지만 이 같은 사찰은 김영삼 정부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기지촌에서 매춘을 해온 여성들이 기지촌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 기지촌 밖에서 이 여성들은 사회적 성원권이 없다. 이런 점 때문에 기지촌 여성운동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문제가 생겼을 때 쉽게 다른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지촌 여성들은 자신들이 구타당할 때 아무리 기지촌 여성단체의 공간이 좁아도 서울에 있는 여성단체의 쉼터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98년 여름 경기도 북부지역에 수해가 났을 때도 이 여성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난가지 못하고 15평 공간의 새움터 사무실에서 20명이 함께 지냈다. 매춘여성이 탈 매춘하는데 어려움은 빚과 포주로부터 쫓김(폭력, 협박), 사회적 낙인, 경제적 자립 기반 없음, 건강 문제 등이다. 혼혈 아동이 있을 때 기지촌을 떠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결혼이나 전직 등으로 탈 매춘에 성공했을 경우라도 기지촌에서 알았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과거의 ‘손님’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국내 매춘 여성들의 공포라면, 기지촌 여성들은 자신이 기지촌에 있었다는 것, 자신의 매춘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두려워한다. ‘기지촌’ 자체가 너무나 큰 사회적 낙인이다. 때문에 이들은 탈 매춘 이후에도 늘 조마조마하게 지내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남자와 결혼 생활에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비록 많은 수의 현장 여성들을 고용하지는 못했지만 두레방의 전업 사업은 매춘여성 정책에 분명한 대안을 제시했다.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정부의 감시, 탄압까지 받아가면서 민간 여성운동 단체가 매춘 여성 전업 프로그램을 제시한 것이다. 1995년 경기도여자기술학원의 방화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이제까지 국가의 매춘 여성정책은 강제 수용, 처벌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두레방의 빵 프로그램은 매춘여성들에게 대안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탈 매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어느 기지촌 여성운동가의 표현대로 ‘만일 10년을 매춘했다면 그 경험을 극복하는 데에는 30년이 걸릴 정도’로 매춘 특히 기지촌 매춘은 극단적으로 소외된 노동이다. 그 만큼 탈 매춘의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빵 프로그램은 최초의 전업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매춘여성운동과 국가의 매춘정책에 훌륭한 모델을 제공했다. 그러나 국가의 체계적 지원과 매춘여성에 대한 낙인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단체의 전업 사업은 상징적 의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특히 전업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사회 경제적 자원이 빈약한 여성운동의 힘만으로 풀어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두레방은 의정부에 이어 1990년 동두천시 보산동에 사무실을 내고 두 곳을 운영했으나 95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동두천 두레방은 폐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두레방의 활동 주체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여성 출신과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이 갈등을 빚게 된다. 이는 운동 노선상의 갈등을 포함하여 지도력 부재, 개별 활동가들의 경험과 개성, 사업 방식, 정서적 차이 때문이다. 크지 않은 조직에서 개인의 문제는 종종 조직의 존폐 여부를 결정짓기도 한다.


학생운동 출신의 젊은 실무자들은 더 이상 두레방에서 기지촌 여성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 하여 95년 12월부터 새로운 기지촌 여성운동체 ‘새움터’를 창립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새움터는 두레방 활동가의 딸 ‘새움’이의 이름을 딴 것인데, ‘새움(새싹)이 돋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새움터는 동두천에 사무실을 두고 몇 가지 운영원칙을 정했다. 기존의 일부 여성운동 조직처럼 명망가나 소위 ‘어른’을 이름만 빌려 대표로 하지 않는다. 실제 일하는 활동가를 대표로 두어 일하는 사람과 이름나는(?) 사람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또 운영비를 확실히 내고 현장 여성운동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운영위원으로 하여, 일부 단체처럼 운영위원이 사업의 지원자이기보다는 실무자들의 업무만 가중시키는 구조가 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 결과 당시 29세의 김현선을 대표로 하고, 참사랑 쉼터, 두레방, 여성의전화 등 일선에서 일했던 젊은 활동가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새움터는 96년 가을 동두천시 생연동에 약 15평 정도의 가정집에 전세로 입주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밤 보육과 전업 프로그램인 허브(herb) 사업이다. 다른 취업 여성들과 달리 기지촌 여성들은 주로 밤에 일하기 때문에 자녀(주로 혼혈아)가 있는 여성들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아이를 클럽에 데리고 가거나, 문을 잠가놓고 가두거나, 아이를 옆에 재워두고 혹은 아이가 보는 앞에서 매춘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밤 보육 프로그램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었으나 2년 정도 운영하다가 현재는 잠시 운영을 멈춘 상태이다. 상근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24시간 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움터 상근자들은 급여는 월 20만원 정도인데 그나마 체불이 많아서 새움터 근무를 하면서 서울과 동두천을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르바이트와 일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밤 보육을 지속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체력의 한계를 가져왔다.


새움터는 98년 ‘시민운동지원기금’(500만원)과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로부터 탈 매춘을 위한 전업 프로그램 사업으로 지원금(900만원)을 받아 98년 9월26일 동두천에 허브 가공 가게를 열고 현장 출신 여성 1명을 고용하였다. 이 가게는 지역에서 ‘여성 센타’ 라고 하는데 허브 화분, 종이 꽃, 향기 나는 주머니 등을 직접 만들어 팔고, 전시한다. 이후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라는 민간단체로부터 ‘기지촌 지역 실직여성 다시 서기 일 공동체’라는 프로젝트로 기금(61,462,500원)을 지원 받아 현장 여성 10명(상근 5명, 반상근 5명)을 고용하였다. 물론 위의 지원금으로 새움터 활동가들의 급여 지급은 불가능하고 허브 가게를 지속적으로 꾸려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다. 그러나 어쨌든 새움터의 전업 프로그램이 여성특별위원회로부터 지원 액수 1위 사업으로 선정된 것은 몇 년 전에 정부로부터 사찰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매우 큰 변화이다. 현재 김대중 정부는 기지촌 여성운동 단체를 ‘반미 단체’보다는 ‘불우 여성 복지시설’로 인식하고 지원금을 주거나, 여성특별위원회의 담당 사무관이 ‘수해 피해는 없었느냐’고 안부 전화를 할 정도로 상황이 변했다. 정부나 학계는 기지촌 여성, 매춘 여성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이나 전업 프로그램을 실시해 본 경험과의 전문성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여성운동의 성과를 배우고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시적인 지원금 지급이 아니라 매춘여성에 대한 정책 자체가 기존의 처벌 위주에서 전업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획기적인 전환이 있어야 하고, 이 때 기지촌 여성운동에서 해왔던 전업 사업은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사회의 분위기는 서울에 비해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금방 바뀌지 않으며, 기지촌 여성운동 단체는 여전히 지역 유지(주로 포주들)와 긴장 관계에 있다. 어쨌든 정부의 사업 지원금을 받으면서 정부가 인정한 단체라는 이미지는 지역 사회에서 기지촌 여성운동을 원활하게 하는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새움터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담은 기록 영화 ‘이방의 여인들’(감독:박혜정/J.T.다카키, 95년 제작, 60분)과 ‘캠프 아리랑’(감독:이윤경/다이아나 리, 95년 제작 완성, 25분)을 제작하는데 같이 참여했고 현재 한국 상영권을 가지고 있다. ‘이방의 여인들’은 96년 미국 공영 TV PBS로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고 96년 제1회 서울인권영화제 출품되었다. ‘캠프 아리랑’은 95년 마가렛 미드 다큐멘타리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새움터는 흑인 혼혈 뇌성마비 시인 이영철의 시집 ‘나는 바보가 좋다’(개마서원, 1997)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새움터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의 기록과 활동 내역을 자료화, 출판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두레방으로서는 그간 중심적으로 일해왔던 젊은 활동가들이 그만두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활을 통해 확보되었던 자원 활동가, 학생운동과의 네트워크는 물론 각종 활동 프로그램의 노하우가 활동가의 이동과 함께 모두 새움터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현재 두레방은 문혜림, 이성혜 원장에 이어 유복님의 언니 유영님씨가 수고하고 있다.


8. 기지촌 여성의 아메리칸 드림 - 송종순 사건

1992년은 기지촌 여성운동이 우리사회에 대중적으로 알려짐과 동시에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해이다. 송종순 사건과 윤금이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미군과 결혼하여 매춘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덜’(?)하고, 존재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미국으로 가는 것은 많은 기지촌 여성들의 꿈이자, 스스로 기지촌에 들어오게 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이다. 그러나 매춘여성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처벌이 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음은 국제 결혼한 기지촌 여성들의 삶에서 그대로 증명된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특별한 기술이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기지촌 여성이 이국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다. 게다가 미군이었던 남편이 마약 중독이거나 생활 무능력자, 구타자인 경우가 많다. 사회적 연결망이 전혀 없는 아내의 약점을 잘 아는 미국인 남편들의 학대와 (매춘으로)돈을 벌어오라는 강요는 다시 여성들을 매춘으로 몰아넣는다. 대부분 기지촌 여성의 국제결혼은 이혼으로 결말을 맺고 미국에서 이혼 당한 한국여성들은 절대적인 빈곤 상태에 놓이게 된다.


송종순 사건은 기지촌 출신 여성의 국제결혼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송종순은 어려서 부모가 잇달아 사망하자, 오빠의 생계를 덜어주고자 오빠와 동생들을 위해 기지촌으로 오게 되었다. 그녀는 영국군과 결혼하여 아이를 하나 낳았으나 영국군은 아이만 데리고 돌아갔다. 그후 평택 기지촌에서 만난 미군을 따라 19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미군과는 미국에 온지 2년만에 이혼 당했다. 이후 다른 미국인과 결혼하여 모세, 에스더라는 이름의 두 남매를 낳았는데, 영어와 미국의 사회제도를 몰라 아들을 뺏긴 경험을 했던 그녀는 출생 신고도 하지 않고 아이도 집에서 낳았다. 87년 남편의 구타와 가난을 견디다 못한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