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섹슈얼리티, 인권
정희진
* 여성은 섹스함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 여성의 몸은 남성 권력의 전쟁터이자 지도(map)
* 정치적 제도, 사회적 모순으로서의 섹슈얼리티
* 여성의 존재는 몸으로 환원
* 가부장제 경제는 여성의 교환으로 유지
* 남성/국민 정체성은 여성과의 섹스를 통해 형성
* 가족주의/민족주의/국가주의와 여성 섹슈얼리티
* 근친강간과 근친상간의 성별 차이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의미
*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간 장치로 환원
* 인권의 시각에서 본 여성에 대한 폭력
*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일탈이 아니라 규범
* 폭력은 이성의 실패가 아니라 이성의 실현
전쟁이 선포된 바 없어도,
여전히 여성들이 가까운 남성에게 매를 맞을 때,
부인들이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조용히 사라질 때,
매춘여성의 시체가 강 위로 떠오르거나
버려진 건물의 넝마더미 속에서 발견될 때,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고난 기록에서 삭제된다.
그 이유는
피해자가 여성이며 어쩐지 섹스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너무 특수하여 보편적이지 않거나
너무 보편적이어서(흔해서) 특정할 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또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여성적일 수 없거나
너무나 여성적이어서 인간적일 수 없거나
어느 하나를 뜻한다. - 캐더린 맥키넌
1. 성기 노출과 스트립 쇼의 차이
두 명의 성인 여성이 남자 한 명에게 성폭행 당했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바로 며칠 전 내가 상담한 사례이다. 피해 여성은 말한다. “남자의 벗은 몸을 본 순간 그냥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가부장제 혹은 성별 제도(gender system)는 여성과 남성의 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다른 해석’은 다름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외교적 수사를 걷어내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중심적 시선, 해석, 필요, 기능, 혹은 환타지다.
거의 모든 여학교 근처에는 소위 ‘슈퍼맨’(남성 성기 노출자를 가리키는 여성들 사이의 은어)들이 상주한다. ‘슈퍼맨’들은 자신의 성기가 여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여성은 남성의 벗은 몸을 보고 공포를 느끼지만, 여성의 벗은 몸은 남성에게 쾌락의 대상이다. 남성은 돈을 지불하면서 여성의 몸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이 성기 노출(flashing)과 스트립 쇼의 차이이다(물론 일부 여성들도 ‘호스트 바’ 등지에서 남성의 벗은 몸을 즐기고 산다. 그러나 산업 규모에서 볼 때 그것은 비교할 바가 못되며, 가장 중요한 차이는 여성이 ‘호스트 바’에 갈 때는 혼자 가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의 몸을 돈을 내고 볼 때, 구매자인 여성은 판매자인 남성과의 개인적 젠더 위계를 상쇄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어 가는 경우가 많다).
근대 해부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왕의 몸이나 노예의 몸이나 모두 똑같은 피와 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몸을 가진 인간은 평등하고, 모든 인간에게는 인권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권 개념은 당위이고 희망이지 현실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장애, 나이, 성별, 인종 등 인간의 몸에 대한 차별적 해석에 따라 수많은 억압이 있다. 무엇이 - 어떤 사회 제도가, 인간의 어떤 사고 방식이 - 인간의 몸을 이토록 위계화 했을까? 그리고 그 위계는 어떻게 지속 가능할까? 성기 노출과 스트립 쇼의 의미 차이는 우리사회의 성폭력, 아내 구타, 포르노그래피, 여아 낙태, 성매매, 정신대 문제 혹은 다른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음핵 절개(clitoridectomy), 전족(纏足, foot-binding), 황산 테러(acid attack), 신부 불태우기(bride burning), 지참금 살인(dowry death), 아내 순장(殉葬, sati) 등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gender violence)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은 개인적인 문제일까, 정치적인 문제일까?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 1946~)을 비롯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질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에게 구타당하고 강간당하면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고, 경찰이나 일본 제국주의에 당하면 정치적 문제, 국가 폭력이 되는가? 가해 남성이 누구인가가 아니라‘피해 여성(survivor)'의 입장, 性(別)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모두 정치적 문제로서 성폭력이며 여성인권 침해이다. 왜 언제나 여성과 관련된 이슈는 사적인 것, 특수한 집단의 문제로 할당되고, 남성의 일은 공적인 것/보편적인 인간의 문제가 되는가? 인간의 역사와 사회적 행동을 공/사 영역으로, 보편과 특수로,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으로, 정치적 문제와 개인적 문제로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한 이분법은 누구에게 유리한 사고 방식인가?
2.『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서구에서 1960년대 말 급진주의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이 등장하기 전까지, 맑스주의 페미니즘이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은 가족, 사랑, 성애, 결혼, 연애 등 소위 ‘사적인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것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기 노출과 스트립 쇼의 예처럼 남녀의 섹슈얼리티가 성별화(gendered)되어 있다는 것은, 이성(異性)의 몸에 대한 경험이 성별에 따라 여성에게는 폭력으로 남성에게는 쾌락으로 인식되는 바로 그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권력 관계를 의미한다.
많은 사회에서 남성성의 정의는 성적인 정복과 폭력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남성 섹슈얼리티는 젠더를 구현하는 노력에(‘진정한 남자’라는 감정) 의한 것이며, 남녀 모두 젠더에 기반한 문화적 의미 없이는 에로틱한 감각이 생기기 어렵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는 다른 권력 관계와 다르게 성애화(eroticization of domination) 되어 있기 때문에, ‘본능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이제까지 정치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여성 억압 구조를 문제화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인가, 그리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자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대표적 슬로건인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는 기존의 권력, 정치, 역사, 인권, 민주주의, 법 개념의 근본적 재정의와 확장을 요구하는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인식론적 사건이었다.
안드레아 드워킨의 대표적 저서인『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의 한국어판 표지에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진수, 여성학의 종점’이라고 적혀 있으나, 사실 이 책은 ‘여성학의 종점’이 아니라 ‘여성학의 시작’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케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아드리엔느 리치, 캐서린 맥키넌, 캐슬린 배리, 샤롯 번치, 마가렛 애트우드 등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사상은 어느 한 가지로 아우르기에는 그 범주가 대단히 넓고 복잡하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출산이 여성 억압의 ‘본질’이라는 입장에서부터 해방의 원천이라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성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pro positive sex feminism)에서 反성적인 입장까지(anti sex feminism) 다양하다.
안드레아 드워킨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매우 ‘전투적’이고 논쟁적인 동시에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그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독자적인 개인이 아니라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실현하기 위한 대상이거나 국가, 민족, 가족 등 남성 중심적 공동체의 유지, 계승을 위해 사용되는 출산 도구(‘애 낳는 기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성별 구조 아래서 여성의 출산 능력과 섹슈얼리티는 여성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기원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섹스(여기서는 성교를 의미함)는 그 자체로 남성 지배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 성 활동 영역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 같은 입장 때문에 종종 캐서린 매키넌과 함께 ‘안티 섹스 페미니스트'로 분류된다(그러나 그녀의 이론이 페미니스트 사상가에 의해 분류될 때 안티 섹스의 의미와 일반 남성 대중들이 생각하는 안티 섹스는 그 함의가 다르기 때문에, 그녀는 홈페이지에서 자신을 안티 섹스주의자로 보는 것은 오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녀는 모든 여성이 피지배자로서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진다고 본다. 즉, 여성의 몸이 여성 동질성의 최소 단위가 되는 것은 신체 구조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성차별 사회가 여성의 몸에 부여하는 사회적 평가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종속은 가부장제가 규정한 남녀간의 신체적 성차(sex)에 근거하기 때문에 여성 억압의 원인은 여성의 출산과 성행위에 대한 남성의 통제이다. 이는 가부장제의 핵심 기제, 관계 유형, 방식, 표현이 된다. 따라서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는 계급이나 인종에 따른 여성 억압보다 더 근원적인 억압의 형식, 모든 사회적 모순들의 마지막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보편적인 가부장제 개념은 보편적인 범주로서 여성 개념에 근거한다. 드워킨에 의하면 여성들이 당하는 성적인 폭력과 신체적 폭력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흔히 성적인 폭력이라고 간주되는 강간과 신체적인 폭력이라고 인식되는 아내구타는 다른 종류의 폭력이 아니다. 실제 피해여성들이 강간과 구타를 동시에 경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시선은 그 자체로 성애화 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은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되고, 이는 곧 성차별 제도(gender)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활동(섹슈얼리티)이 성차별(젠더)을 구성한다고 보는 드워킨에게는 섹슈얼리티와 젠더가 분리, 구별될 수 없다.
초기 페미니즘 이론은 육체적인 것(물리적인 힘) 對 정신적인 것(이데올로기)의 구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폭력은 이성적인 지배에 비해서는 야만적인 것으로, 남성 권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부차적으로 동원되는 도구 혹은 최후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권력은 사용을 통해 영속화된다. 권력 관계로서 성별 체계는 한번 완성된 상태에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실천되는 과정이다. 폭력은 권력의 창조를 위해서건 유지를 위해서건 필요하다. 폭력적인 지배와 이성적인 지배는 대립물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사회의 특징인 집단 학살(genocide)과 여성 살해(gynocide)는 남성 중심의 이성주의, 합리주의의 동전의 양면이다. 폭력은 권력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 의식적인 인간 활동, 계획된 실천이라는 것이다. 즉, 이성을 잃었을 때 폭력이 발생한다기보다는 폭력에 의해 이성이 실현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인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권력 행동, 정치적 행동으로 파악할 때 폭력은 남성 지배의 핵심적인 영역이 된다. 여성폭력은 성별 권력 관계의 일환으로서 시대와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여성에 대한 통제라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폭력은 남성성의 일차적 요소인데, 이것은 성별 관계로서 여성성과 대비를 통해서 의미를 갖는다.
성별 관계(gender)의 맥락에서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념화하면, 강간과 이성애 관계에서 ‘정상적’인 성교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여성폭력에 대한 드워킨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은 폭력과 폭력을 통한 위협, 공포는 권력 관계의 부산물이 아니라 위계 관계의 구조적인 토대로서 남성 지배의 중요한 동인(動因)이라는 것이다. 즉, 남성폭력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권력의 한 형태이다.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맑스주의의 주요 개념이 노동이라면,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설명하는 기본 범주를 섹슈얼리티라고 본다. 드워킨에 의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계급 관계(sex class)는 섹슈얼리티를 통해 조직화된다. 남성(male)이 남자다운 - 그러므로 진정한 - 남성(man)이 되는 것은 여성과의 섹스를 통해서이며, 여성은 섹스를 통해 인간에서 여성의 지위로 하락한다. 이는 곧 여성의 존재가 남성을 위한 몸(성 역할, 젠더)으로 환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을 통한 남녀 관계의 불평등이 가부장제 사회의 ‘물적’ 토대이다.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랑과 강간, 사랑과 포르노, 사랑과 매춘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성별 권력 관계(gender)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필연적으로 성별 위계 속에 존재한다. 현재 거의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는 성의 이중 윤리, 여성에 대한 폭력은 바로 그 현상이다.
드워킨은 자전적 소설『신에게는 딸이 없다』에 썼듯이, 그녀 자신이 성폭력과 아내구타의 피해자였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계급 문제가 아니라 젠더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인 여성,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이제까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남성의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는 문제(hidden crime)였기 때문일 뿐, 대부분 여성들의 일상은 남성의 폭력과 그에 대한 공포(밤길 걷기, 혼자 여행하기의 두려움 등)로 점철되어 있다. 여성에게는 일상이 전쟁터이며 매일 대중 매체에 보도되는 성폭력 사건을 모두 기억하고서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으므로, 마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기억상실증(amnesia)’을 통해서 가부장제 사회의 생존자가 된다.
페미니스트로서 그녀를 가장 주목하게 만든 것은 캐서린 맥키넌과 함께 70, 80년대 미국 전역을 논쟁으로 몰아넣었던 포르노그래피 반대 입법 활동이었다. 그녀는 포르노그래피가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 권력 구조의 문제, 여성 인권 이슈라고 주장했다. 포르노는 표현의 자유 혹은 ‘예술이냐, 외설이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러한 자유주의적 패러다임 자체가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에 대한 공격과 강간을 부추기고(‘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다’), 여성을 모욕하는 성폭력이다. 또한 포르노그래피 생산 과정에서 여성들은 맞고, 죽고, 다치며, 경제적 성적으로 착취당한다. 포르노그래피는 그 자체로 남성의 권력, 그것의 크기, 사용, 의미라는 것이다.
소위 소프트 포르노에서부터 하드 코어 포르노, 여성을 구타하고 살해하는 실제 장면을 찍은 스너프 필름에 이르기까지 포르노가 실천하고 있는 모든 성행위에서 남성은 성의 주체이다. 여성은 남성이 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실현하는 물(物), 대상일 뿐이다(대개의 포르노는 남성의 사정으로 한번의 성교가 끝난다). 포르노는 현실과 다른, 상상력을 펼친 예술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현실이다. 포르노는 현실의 권력 관계를 그대로 재현한다. 현실에서 권력과 자원이 있는 자들은 포르노 화면의 대상으로 구성될 수 없고 이러한 재현물은 ‘흥행’에도 실패한다. 즉, 현실 세계에서 인간성을 박탈당하고 열등한 자로 낙인찍힌 사람이 화면에서 고문당하는 경우와 현실에서 관객과 같은 인간이며 권력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 고문당할 때 관객의 반응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쾌락을 느낀다면 후자의 경우는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가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에서는, 남성이 페니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보다 우월하며 여성의 신체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은 남성의 자연적인 권리이므로, 애초부터 성폭력이나 성매매는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남성들에게는 성관계와 성폭력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드워킨은 포르노그래피를 분석하면서 타나토스(thanatos)와 에로스(eros)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학대적 포르노(타나토스)와 에로스를 구별하면서 성활동에 있어서 남녀의 상호 동등성, 상호 교환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드워킨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러한 노력은 ‘미션 임파서블’, 불가능한 임무라고 주장했고 그녀의 이러한 견해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3.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적 주체성은 가능한가?
드워킨의 사상은 80년대 들어 여성들간의 차이와 여성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결정론’이라고 비판받기 시작했다. 여성은 계급, 인종, 종족, 문화, 성 정체성(이성애자/동성애자), 장애/비장애, 나이 등에 따라 개인이 가진 자원과 부(富)는 차이가 있으며 폭력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색 인종 여성이 백인 남성에게 강간당했을 경우 그녀는 성 차별주의와 인종 차별주의를 동시에 경험한다. 남편으로부터 구타와 성적 학대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가정은 위험한 공간이지만, 노숙자 여성들은 그나마 그런 집도 없는 여성들이다. 레즈비언 커플간 가정폭력의 경우 피해자는 동성애 혐오(homo phobia) 때문에 사회의 개입을 요청하기가 더욱 어려우며, 이 때 가해자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다.
또한 여성폭력을 성별 관계의 필연적 결과로 환원한다면 행위자로서 여성의 자율성을 인식하는 것에 실패하기 쉽다. 페미니스트가 강간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폭력이어서가 아니라 강간이 여성의 자발성과 즐거움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어떤 의미에서 ‘예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남성의 폭력은 그 자체로 여성에 대한 권력의 한 형태지만 다른 영역에서의 가부장제 통제 결과에 크게 영향받기 때문에 통제의 ‘기초’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섹스 그 자체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드워킨의 견해는 근대, 서구, 남성 중심적 사고 방식인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뚜렷이 분리될 수 없으며 남녀간의 섹스는 투쟁의 영역이지 고정된 권력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섹스는 새로운 성적 실천과 언어를 통해 변화 가능하다. 결국 드워킨은 여성을 주체로 보기보다는 모든 여성을 희생자화 했다는 것이다.
드워킨에게 가장 뼈저린 경험은 그녀가 주도했던 포르노 반대 운동 실패의 부분적 이유 중의 하나가 ‘포르노 반대를 반대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드워킨을 비판하면서, 포르노가 여성을 비하하고 학대하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면 ‘할리퀸 로맨스’류의 대중소설이나 멜로드라마도 그 내용은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인간의 성활동을 ‘아름다운’ 섹스와 ‘좋은’ 섹스, 그렇지 않은 섹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력을 국가가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포르노 반대법(‘검열’)은 법적인 실행력이 없을 뿐 아니라 남성의 성적 표현 외에 여성과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들의 성적 표현마저 제약한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여성 폭력에 대한 드워킨의 분석과 이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여성의 현실은 두 가지 입장을 모두 필요로 하고 있다. 여성의 성적 자유와 주체성을 보장하면서도, 남성 폭력의 위험으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은 여성주의 내부의 이론적 모순도 여성의 책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임무는 국가와 사회, 남성이 공동 부담했을 때만이 실현 가능하다.
'여성학자 정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겨레] 짐승 혹은 짐승같은 사회 (0) | 2005.12.15 |
---|---|
[한겨레21] 어느 페미니스트의 유니크한 도발 (0) | 2005.12.15 |
[논문]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0) | 2005.10.17 |
여자의 몸, 여자의 나이 (0) | 2005.10.14 |
다이어트와 섹스 (0) | 2005.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