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읽었다/김연자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기지촌 출신 여성운동가 고통을 딛고 상처를 말하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한-미 ‘동맹 속의 섹스’ 군사주의와 여성의 성 등 많은 논쟁 담고 있지만 결국
‘고통받은 사람의 말하기’ 자기 상처 드러내며 세상과 대화 간절히 원했던
저자의 진정성 앞에서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이건 같은 얘기다. 모든 지식과 정보의 가치는 그것이 유통되는 사회의 세계관에 의해 위계화되어 있다는 의미다. 한국사회에서 중산층 여성성 규범에 충실하려는 여성은 성에 대해 무지할수록 약이고(자랑스러운 일이고), 지식인이 서구의 학문 유행을 잘 아는 것은 권력이자 계급적 행위다. 성매매에 대해 아는 것은 권력인가 수치인가? 그것도, ‘한미 우호의 아랫도리’라는 기지촌 성매매에 대해 알고 말한다는 것은? 아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거나 권력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안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김연자 지음, 안미선/엄상미 기록·구성, 삼인, 2005)는 25년간 동두천, 송탄, 군산 등지에서 기지촌 성산업에 종사해온 ‘현장 출신’ 여성운동가의 자서전이다. 1943년생인 저자의 생애는, 여성의 몸에 각인된 한국현대사이자 냉전시대의 국제정치학이며, 저항도 탈출도 불가능해 보이는 막다른 현실을 변화시킨 놀라운 사회운동이다. 이 책은 공격하거나 방어하지 않고 상처를 힘으로 전환시키는 여성주의 정치학의 전범이다. 학문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피해자(생존자), 운동가, 언어 생산자가 분리될 수 없는 여성학적 글쓰기만이 선사하는 전율을 감각할 수 있다.
여성, 게다가 가난한 여성, 성 판매 여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와 경험은,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열등한 것이고 극복되어야 할 피해다. 그러나 반대로 억압받는 자의 시각에서 기존 사회를 보면, 이들의 타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지성을 가능케 하는 자원이 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탈식민주의 사유의 출발점이다. 나는 자원으로서의 타자성을 이 책만큼 증거하는 책을 만난 적이 없다. 김연자의 삶은 구조 대 개인,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희생자 대 공모자, 성매매 혹은 모든 사회적 억압에 있어서 강제와 동의 등 그동안 지루하게 반복되어 온 서구 근대 사회과학의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한-미 ‘동맹 속의 섹스’(김연자의 증언에 기반해 저술된 여성주의 국제정치학서의 제목), 군사주의와 여성의 성, 한국의 남성 중심 거대 담론 위주의 사회운동, 성매매와 성폭력, 여성에게 ‘아버지’의 의미, 부자 중심의 정신분석학을 전복시키는 모녀 관계, ‘한국적 가부장제’ 특유의 교활과 위선, 여성들 간의 사랑과 존경 등 수많은 논쟁을 담고 있지만, 나는 이 모든 이슈들을 ‘고통받은 사람의 말하기’로 읽었다. 이 책은, 건드리기만 해도 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오래되고 내밀한 상처를 어떻게 타인과 소통하며, 관계 맺을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삶의 근원적인 주제를 다룬다. 일반적으로 아우슈비츠 학살이나 집단 성폭력 등 트라우마(끔찍한 정신적 외상)의 생존자들은, 고통을 겪은 자신과 고통을 말하는 자기 사이에서 분열한다. 자신의 고통을 믿지 못하는 청자를 위해 자기 경험을 조절하거나 의도적으로 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 자체도 상처지만,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상처다. 그래서,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commitment)하는 실천인 것이다. 그녀는 평생 동안 맹렬하게 사랑하고 맹렬하게 상처받았으며, 배신당하면서도 조건 없이 신뢰했으며, 쉼 없이 노동하고 봉사했다. ‘극단의 진정성’. 자기 상처를 드러내며 세상과 대화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저자의 성숙함과 자기 존중감 앞에서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기사등록 : 2005-09-08ⓒ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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