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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에서 발행하는 『한국통계연감』에 따르면, 25세에서 39세의 한국 여성 중 현재 미혼 상태의 여성은 약 20%에 육박하고 있다. 같은 연령대의 미혼 여성은 1985년도에는 9.5%였으나 2000년에는 18.3%이다. 이 같은 ‘오싱(오리지널 싱글)’ 외에 사별 혹은 이혼 후 재혼하지 않은 ‘돌싱(돌아온 싱글)’까지 포함하면, 남성과 살지 않는 여성 인구는 이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1990년에 24.8세였지만, 2003년에는 27.3세로 높아졌다.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성(19.9%)보다 여성(34.1%)이 훨씬 많다. 사단법인 서울 여성의 전화 ‘싱글 여성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김지혜(가명, 29세) 씨는 “모임에 참가하는 여성들 대부분 대화가 통하는 남성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여성들의 의식 변화는 급격한데, 여전히 무례하고 폭력적인 남성들이 많다”,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성과 결혼하면 더 큰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미혼(未婚)’ 여성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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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극적으로 결혼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비혼(非婚)’ 여성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독신 여성 가구에 대한 정책 부재와 사회적 편견, 이성애 중심의 결혼 제도가 인간관계의 친밀성을 독점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비혼 여성들에게 외로움은 여전히 두려운 이슈다. 외로움은 심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경제학적 문제인 것이다. 남편과의 소통 부재로 인한 기혼 여성들의 괴로움과 외로움은 더 심각할 수 있다. 하긴, 어차피 외로움이란 삶의 조건이어서 결혼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롭다. 시인 신현림의 표현대로, “여자에게 독신은 홀로 광야에서 우는 일이고, 결혼은 홀로 한 평짜리 감옥에서 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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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까지 여성의 외로움은 ‘먹고 살 만한 여자들’의 ‘사치스런’ 고민으로 간주되어 왔다. 1970년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이 『여성의 신비』에서 지적한대로,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양육에 헌신한 중년 여성들의 우울증과 고독인 ‘빈 둥지 증후군’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외로움은 중산층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같은 기존의 시각이 저소득층 여성의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사회 복지적 지원을 막고 있다. 사회 경제적 자원이 없는 여성들일수록 심리적 자원도 부족하기 쉽고, 의논할 곳도 마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으로 독립했다고 해서 심리적 독립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외로움을 호소하지만, 이는 젠더(gender: 性別)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에게는 더욱 힘든 인생의 과제이기에 사회적 차원의 대책이 요구된다. 남성과 여성의 외로움은 성별에 따라 각기 다른 원인과 양태를 보인다. 남성은 성취를, 여성은 관계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도록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여성은 상대적으로 외로움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남성은 대개 독립심과 자립심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아왔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여성들은 배려와 보살핌의 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사회의 지배적 원리가 ‘여성적 가치’가 아니라 ‘남성적 가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이 사회화된 방식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을 의존성이나 ‘쿨’하지 못한 것과 연결시키는 사고방식은, 남성 중심적인 인식이며 이로 인해 남녀 모두 고통 받게 된다. 이제까지 여성은 남성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사람들이었지,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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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많은 여성들, 특히 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업무 경쟁이 치열하고 스트레스가 많은데, 집에 오면 집안일도 내 차지고… 남편 짜증과 비위 맞추기에 지쳤다”며, “나도 마누라가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대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심리적 자원이나 인간 관계망 역시 사회적으로 자원이 많은 사람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룸살롱이나 성매매 등 향락 산업은 남성만을 위한 대표적인 ‘위로’ 문화다. 스트레스 탈출을 위한 술, 담배, 스포츠, 섹스, 여행, 낚시 등의 기호나 취미 생활 역시 남성들에게 훨씬 더 개방되어 있다. 사회는 남성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여성의 외로움은 ‘사소한 일’로 취급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유난히 남자의 기를 살리자는 식의, 남성을 불쌍히 여기는 담론이 만연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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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구조 중의 하나는, 남성이 여성의 친밀성 능력과 감정 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랑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남자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내재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가 유지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 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대개 남성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별 분업인데,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며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 관계에서의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 노동, 감정 노동, 정신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 때문이다. 70여 년 전 독일의 여성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성공 심리에 대한 남녀 간의 성차(性差)를 분석하면서, 여성이 성공을 두려워하는 심리를 ‘성공에의 공포’라는 말로 표현했다. 유사 이래 인간관계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남성들을 위로하는 보살핌 노동은 여성의 성역할로 간주되었고, 여성들은 ‘바깥 일’을 하면서도 이러한 노동을 묵묵히 견디어 왔다. 남성의 성공은 사회적으로 지지받지만, 여성의 성공하려는 의지나 권력에 대한 추구는 여성성에 대한 위반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격려받지 못한다. 호나이에 의하면, 여성은 성공이 자신의 여성성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공을 두려워하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성공에의 공포’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시화되고 성 평등 의식이 확산되면서 여성들이 보살핌 노동을 거부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외로운 이른바 전사회적인 ‘보살핌의 위기(care crisis)’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시대 여성에게 ‘어머니 같은 한없는 이해’를 요구하거나 강요하는 남성은 ‘왕따’되기 십상이다. 이제 여성들은 친밀성이나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도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남자는 외롭다. 어떤 면에서는 감정 표현을 억압 당해온 남성들이 더 외로울 수도 있다. 남성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버지』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그만큼 외로움을 호소하는 남성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남성의 외로움은 많은 경우 남성과 남성 간의 갈등에서 발생하지만, 여성의 외로움은 남녀 간의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또한 남성의 외로움은 보살핌의 가치나 감정 영역을 폄하해온 남성 문화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남성 외로움의 ‘가해자’는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도 타인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감정 노동의 영역에 참가하는 것이 남녀 모두가 사는 상생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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