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주일(2005-6-5) Imago Dei 로서의 책임적 존재
창 1,1-10; 24-28 마태오 6, 25-34
[정말 생각하는 갈대인가?]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에 비하면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생물 모든 지상의 존재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그는 죽으면서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 앞에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작은지 알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아무 것도 모른다. 우리 인간의 우수성은 이성의 사고력에 있다 오직 사고력만이 우리를 다른 세계 위로 높여 준다. 우리의 사고력을 소중하게 지키라. 그것은 우리의 삶을 골고루 비추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파스칼의 명상록)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불란서 철학자 파스칼의 이 정의는 인간의 이성의 우수성과 동시에 육신의 연약함을 포괄적으로 집약한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이러한 그의 정의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동의하면서 자연에 대한 그의 판단이 과연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과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인간만이 알고 있고 자연은 아무 것도 모르는가? 인간의 무제한적인 개발과 착취로 인해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이 나날이 높아가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과연 자연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파스칼의 주장과 같이 여러분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저는 어제 아침에 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의 테니스를 치는 동료가 있습니다. 몸도 건강하고 테니스도 저보다 잘 치는 분이셨는데, 1주전 테니스를 치기 위해 차에서 내리다가 심장경색으로 쓰러져서 그만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의 죽음에 아파하면서 과연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대처하고 있었을까? 제가 그 분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오늘 우리들 주위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 파스칼이 주장한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인간은 오히려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고 죽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자연은 오히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지난해 12월 인도양에서 지진해일이 일어났을 때 동물과 인간 중 누가 그 죽음의 위협을 먼저 감지했나요? 동물들은 그 위험을 감지하고 산위로 피신했지만, 인간만이 그 위협을 감지 못하였습니다. 동물의 세계 같은 기록영화를 보면 동물들은 자신의 죽음의 때가 이르면 가족과 동료를 떠나 조용히 숲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은 정반대의 행동을 취합니다. 어떻게든 죽지 않기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고 발버둥칩니다. 누가 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파스칼은 더 나아가 인간만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아는 사고력을 갖고 있다 하였는데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보거나 오늘의 현실을 볼 때에 인간만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모르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안다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모르는 것입니다.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동물의 왕자들은 남의 영역을 함부로 침입하지 않습니다. 필요 이상의 동물을 잡아먹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힘이 넘치면 이를 주체하지 못해 남의 땅을 침범하여 그 땅을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파스칼보다 한 세기 후의 미국의 저술가이자 설교가였던 채닝은 말하기를 ‘인간의 이성이야 말로 사색하는 자연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것은 신과 만물의 합일에 호응하는 것이며 우리의 영혼을 그 최고의 합일로 비추는 거울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파스칼도 종교적 명상가로서 많은 신앙의 글을 남겼지만, 그는 수학자로서 인간의 이성을 자연과 대립적인 관계로 보았다면 채닝은 이성을 신과 만물에 합일하는 보완적 관계로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인류가 이 파스칼과 같은 잘못된 이성적 개념 곧 주객분리의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고 전인적 사고 곧 주객의 합일- 인간의 이성을 신과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채닝의 보완적 관점으로 바꿔질 때, 지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서구의 이성의 힘은 16세기에는 르네상스의 이름 하에 18세기에는 계몽주의의 이름 하에 그리고 금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혁명의 이름 하에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결과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결과라고 하는 것은 자연 파괴이고 이로 인한 인간종족의 멸망이라는 비관적인 결론입니다.
[창세기 1장은 자유와 해방을 향한 신앙고백이자 찬양이다]
여기에 대해 성서는 뭐라고 말하는가? 지금까지 많은 서구 신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동조해왔고 그 근거를 창세기 1장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 시간에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창세기 1장은 이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에 대한 과학적 서술이 아니라 이는 온 우주만물이 야훼 하느님의 손에 의해 창조되어졌다는 신앙고백이자 찬양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만약 우리가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는다면 운율과 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하나의 찬양시라고 하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5일간의 창조기사는 각기 그 첫머리에서 ‘하느님께서...’로 시작하여 ...있으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밤, 낮 하루가 지났다.‘는 어구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각 어구의 말미 운율이 맞아 떨어지는 아름다운 놀라운 시편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거기서 과학적 논증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접근입니다.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대로 창세기 1장은 진화론에 대항하는 창조론을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서술문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종교적 답변이며 우리 인간은 주위의 다른 동물과 식물과 그리고 자연세계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며 하느님의 손에 의해 창조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지금까지 서구 교회가 가장 중요시여긴 단어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구원사적 관점에서 본 서구인들의 견해입니다. 우리 동양인들의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합일이라는 자연신학적인 사고로 본다면,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서구신학의 영향 속에서 별다른 성찰 없이 서구의 구원사적 말씀신학에 휘둘려져 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많은 남한의 교인들은 구원에만 관심하고 문자에 매여 있습니다. 창조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느냐?는 논리에 빠져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본래의 창조 세계를 어떻게 회복시켜 가야 할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은 없고 아담이 원죄를 저질렀으니 우리는 둘째 아담 예수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는 교리에만 관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십자가를 지는 행동은 뒤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성서문헌학에서 본다면, 유대민족 바벨론 포로시기 그러니까 시대적으로 말하면 구약성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놓여져 있어야 할 문서입니다. 유대민족이라는 야훼 하느님을 믿는 소수민족이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군사문화에 지배를 당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강제로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그들 앞에서 원치도 않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수치 속에서 살아가면서 과연 우리가 믿었던 야훼 하느님은 살아계시는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우리 조상의 하느님은 과연 지금도 존재하시는가?에 대한 실존적 질문에 대해 자기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한 고난의 고백이 바로 이 창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이 얘기를 단지 설화로 치부하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과학적 서술로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창조기사의 저변에는 이러한 약자로서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얘기는 바벨론의 마르둑 신을 넘어서는 야훼 하느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리하여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책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인간의 책임적 존재를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으로 설명한 Imago Dei(Image of God)란 라틴어입니다. 실은 그냥 우리말로 ‘하느님의 모습 혹은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하여도 됩니다만,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신학에서 자주 통용되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피조물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말은 외적 모습이 아닌 내적 모습 곧 하느님의 심성과 본질을 지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위임받는 관리인 혹은 청지기의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에서 창조보존의 관점에서 지금까지 오해한 성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본문에서 26절에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짐승을 다스리게 하자.’는 다스림의 단어와 38절에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하는 정복의 단어입니다. 이는 결코 지배/피지배의 상하구조 안에서 힘 있는 자가 연약한 자를 정복한다는 군사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스리라는 ‘아바드’라는 히브리어는 ‘섬긴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노예나 종이란 히브리어도 같은 어근이다. 정복하라는 말도 인간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의 어머니 사랑으로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청지기의 의미가 더 강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정복하라는 의미를 오해할까봐 2장에서 에덴동산의 얘기를 하면서 다 먹어도 좋은데, 중앙에 있는 선악과의 열매만은 먹지말라는 금지 조항을 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책임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최근 황우석교수의 배아줄기세포의 의학적 성공을 세계 의학계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놀라운 발전으로 보기도 하고 한국 정치계나 경제계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기도 하지만, 저는 한 종교인으로 많은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 자연과학의 발견이 처음 의도대로 인류에게 복지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벨이 발견한 다이너마이트는 광산 개발에 획기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이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전쟁무기로 변했습니다. 에너지 개발을 목적으로 한 핵개발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줄기세포도 인간의 불치병을 치료하는 일에 공헌하겠지만, 결국 자본은 그곳에만 사용하도록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애완용 동물을 복제하는 일에 쓰일 것이라고 낙관하지만, 재벌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을 때, 그를 복제하는 것을 무슨 재주로 막을 것입니까? 그래서 똑같은 인간이 두명 세명 만들어졌을 때 그때 일어나는 인간사회의 혼란상과 윤리적 정신적 혼란은 누가 막을 것입니까? 법으로 한계를 지으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인간 역사가 가르치는 것 하나는 사람은 힘이 주어지면 결코 그걸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도 힘만 생기면 짐의 말이 곧 법이라고 외치고 나선다는 것입니다. 칼이 곧 정의가 되는 법칙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태주의자 예수>
독일의 환경운동가인 프란츠 알츠가 지은 <생태주의자 예수>라는 책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이제 인류의 생존은 정신과 영혼의 철저한 방향 전환에 달려 있다. 새 천년에는 100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현재 선진산업국에 사는 8억의 사람들처럼 살기 원한다. 그러나 지구는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행성이 아니다. 또 우리가 그런 상황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변화의 길을 우리는 어떻게 누구에게서 배울 수 있을까?
이천 년 전 나사렛의 한 젊은이는 이렇게 가르쳤다. 감탄하고 사랑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예수가 원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이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곳이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그의 근본 프로그램은 신뢰, 희망,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무딘 양심을 버릴 때에만 제 기능을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생태운동의 전위로 나서지 못했다.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이 땅의 운명에 거의 무관심하다.‘ (13,14쪽)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걱정하지 마라. 저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흔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주제로 인용되는 이 구절은 실상 우리 인간의 눈을 자연으로 향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이 자연도 하느님의 것이지 않느냐? 너희들도 마찬가지이고.
여기서 프란츠 알츠는 한걸음 더 나아가 외치기를 ‘참 예수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제도화된 종교를 꿈꾸지 않았다. 그가 꿈꾼 것은 정신적 생태적 삶의 방식이며, 새 천년의 전환기를 맞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추고하고 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삶의 품격을 애써 추구하는 사람을 꿈꾸었다.’ (17쪽)
오늘날 인간이 겪는 환경의 위기는 곧 인간 내면세계의 위기입니다. 저는 오늘 이 지구가 아파하는 모든 과학적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기록들은 신문이나 인터넷 어디에고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에너지 위기의 문제나 매연으로 인한 공기오염, 삼림의 파괴, 지구의 온실화로 인한 기상계의 변화와 해면의 상승,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100가지 종류의 동식물이 멸종당하고 있다는 사실 등 더 숫자를 나열하며 위협적이고 종말적인 애기들을 얼마든지 펼쳐갈 수 있습니다. 한 시간 내내 그런 보고만으로도 시간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냥 우리 피부에 닿은 얘기만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깨닫는 것은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차세차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더러워졌다가도 비가 오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비만 오면 차의 먼지가 씻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가 흙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보기에 서울은 단순히 대기오염이 위험한 도시가 아니라, 죽음의 도시입니다. 전 북한산 자락에 살고 있지만, 별로 새소리를 들어보지 못합니다. 내가 새라도 이렇게 공기가 더러운 곳에는 살지 않습니다. 어제도 분당의 한 교우 집을 다녀오면서 짓게 희뿌옇게 가라앉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도 희뿌여져 갔습니다.
[새로운 신앙고백이 필요한 때]
교회는 시대 시대마다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하느님의 부름으로 알고 응답하는 신앙적 공동체입니다. 그리하여 60년대 이래로 우리 한국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신학의 흐름들이 있어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바로 하느님의 거룩함이 살아 숨을 쉬는 현장이라고 하는 세속화 신학, 소외된 자 억눌린 자 속에 갈릴래아의 예수가 현존한다고 하는 제3세계 신학의 이름 하에 해방신학과 민중 신학, 우리 한민족의 수천 년 고유한 전통 속에 이미 야훼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토착화 신학, 우리 민족의 분단된 아픔을 해결하는 것이 예수 십자가 화해를 실천하는 최우선의 과제라는 통일의 신학들이 시대 시대마다 제 소리를 내며 함께 존재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종교간 대화를 강조하는 종교대화신학,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최강국 미국을 중심한 정치경제의 일방적인 세계화 속에서 비인간화되어가는 오늘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치신학이 태동하고 있고, 인간의 생명과 환경을 관심하는 생명신학 생태신학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여러 신학적 활동에 비추어 남한 교회가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점에서 남한교회처럼 구태의연한 교회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교회나 천편일률처럼 예배 시작과 더불어 사도신경을 외우고 있는데, 그건 4세기 초 초대교회가 성령의 위치가 신앙적으로 도전받을 때에 성부 성자 성령은 본래 한분이시다.라는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이 위협받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사도신조를 계속 고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분단극복과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신앙고백이 필요하고 자연환경에 대한 책임성을 강조하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조를 앵무새마냥 외우고 있고, 그리고 그것이 순서에 없으면 마치 이거 이단교회가 아니냐? 하는 소아병적 질문을 던지는 교조적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의 환경과 우리가 사는 땅과 자연에 대해 관심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생명체이고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교회가 관심을 갖고 진행하고 있는 교회 정관에도 이러한 오늘의 교회의 신앙고백이 보여 져야 합니다. 초창기의 우리 교회가 지향했던 평신도목회와 현장선교와 공동체의 신학들을 견지하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적 부름을 인식하는 새로운 신앙고백이 그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관은 단순한 법률 조항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회와 사상을 오늘의 현실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구체적 의지와 방향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거기에는 분명히 오늘의 물질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자연 환경에 대한 교회의 회개와 신앙고백도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의 내면성]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만이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주위에 대한 깨여 있는 의식입니다. 깨여있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릴 만큼 무슨 일을 하든지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고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훈련입니다. Eknath Easwaran 이라는 인도 작가가 쓴 에서 밥을 먹을 때 조차에도 다른 일을 함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거나 대화를 하지 말고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권합니다. 저는 이 말을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으면서 신문을 보거나 책을 보는 일을 중지했습니다. 반찬 하나에 담긴 정성을 생각하고 햇빛과 비를 생각하고 그 색깔을 음미하고 입안에서 씹히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먹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주장하는 것은 이렇게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여야 자기를 잃지 않고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에도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학생 때에는 기껏해야 라디오의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귀에는 MP3 음악을 듣고 눈과 한손으로는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이 들고 친구들과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tv가 켜져 있습니다. 저는 전에 생각하기를 현대인들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역량이 주어진 하나의 발전으로 보았습니다만, 이거야 말로 큰 오해였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톤에서 열린 디너파티에 참석하였다가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 새벽 2시를 가리킵니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미안하게 되었다면 ‘이런 말을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만 돌아가 주셔야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강의가 있어서요.’‘앨버트 여긴 우리 집이에요.’ 한번은 동료가 거리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자 점심은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내가 지금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집으로 가고 있다면 먹지 않은 것이고 학교 쪽으로 가고 있다면 먹은 것이니까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자신을 착각하는 것과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면서 자신을 착각하는 것은 매우 다른 일입니다.
아이슈타인이 갖는 몰입은 일상생활에는 어려움을 주지만 특별한 혜택을 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깊은 차원에서 당신과 내가 분리되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나머지 피조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고 매사에 당신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인들은 자기만의 몰입 속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와 상대방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분주해야 한다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잘못된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려 분주하게 움직이려고 합니다. 지금 손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그 다음 일에 가 있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어느 교포에게서 있었던 일입니다만, 어떤 생각에 빠져 다리미질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러자 이 부인이 그만 들고 있던 다리미를 귀에다 대어 큰 화상을 입었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분주함이고 이 분주함 속에 자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릅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자랑스러운 말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여도 하루를 즐기면서 살아갈 수도 있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져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들여다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손과 발과 마음과 혼과 영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중에 침묵이 일어나면 매우 불안해합니다. 밤중의 적막함이란 단어는 이제 문학서적에서만 만나는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갖가지 자연의 소리를 내는 풀벌레 대신 우리는 tv에 등장하는 사람을 죽이는 총소리와 질주하는 차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급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은 병든 마음입니다. 환경오염은 마음의 오염에서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여 급히 가려고 하니까 오염이 생기는 것입니다. 느린 마음은 건강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고요한 마음은 거룩합니다. 여기에 오늘부터 목회기도 후에 침묵기도 시간을 마련한 의미가 있습니다. 소음과 불필요한 말이 난무하는 속에서 이제는 우리들 자신을 깊게 성찰하는 낮아짐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예배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덜 익었을 때는 말이 많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이 자신의 진실 된 사랑을 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을 알기에 아예 입을 닫고 맙니다. 그저 눈으로 얘기하거나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사실, 전 오랫동안 이 침묵기도와 회중기도송을 어떻게 향린교회의 주일예배 속에다 넣을 것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지난주 워싱톤 시내의 한 자그마한 교회 그러나 도시목회의 한 모델교회로 인정받고 있는 세이비어교회의 예배속에서 다시금 침묵 속에 임하는 성령의 감동을 경험하면서 이를 실행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로날드 사이더라는 사회개혁적 복음주의자인 목사님은 ‘환경 보호를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진정 필요한 것은 영적 거룩한 마음입니다.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적인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환경에 대한 수많은 법을 만든다 할지라고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영혼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침묵 속으로 들어갈 때, 자연의 고통받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단지 인간의 구원만을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자연세계의 총체적 구원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우주적은 실천은 구체적으로]
이제 구체적인 환경보존의 사례들을 한번 나눠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향린교인들은 이 분야에서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제 얘기를 잠깐 해보고자 합니다. 제 승용차에는 금요일에 쉰다는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본래는 월요일표를 붙이려고 했는데, 구청에 마침 월요일게 없어서 금요일을 붙였습니다. 그렇다보니 가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교회만 아닌 다른 곳을 가야할 때, 고민이 생깁니다. 목사가 스스로 약속을 어겨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는 교회를 나오면서 더 고민을 했습니다. 버스를 이용하면 시간으로 배가 걸리기 때문이고, 잘못하면 버스를 기다리는 일에만 15분을 소비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환경주일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는 목사가 금요일 쉬는 승용차를 운전할 수는 없어 버스를 탔습니다. 사실, 말하기는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것이 환경에 대한 관심입니다.
제가 집에서 우리 아내에게 핀잔을 듣게 되는 일이 있는데, 요즘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 이런 핀잔도 덜 받습니다만, 그것은 제가 소변을 보고서는 물을 잘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만 보고 그 많은 물을 내리기에는 아까 와서 두세번 한 다음에 물을 내리거든요. 거의 20년 전에 이스라엘을 방문하였을 때, 거기 호텔들은 화장실 물을 높은 곳에 달아 놓았습니다. 수압이 놓으니 자연히 물을 조금만 사용을 해도 씻겨 내려가게 되고 소변용과 대변용 손잡이가 따로 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왜 이런 것을 잘 사용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신욕 저도 좋아하지만, 때로는 물이 아까워서 그냥 샤워를 합니다. 어떤 분은 대변까지 그냥 두어서 부부싸움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한국은 식당이나 교회에서 양철 컵을 쓰는 것이 일상화 되었지만, 미국교회는 대체로 일회용 컵을 사용합니다. 오래전 미국서 목회하면서 교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자기 컵을 가져와 보관하도록 하고 일회용 컵은 전혀 쓰지 못하도록 한 적도 있었습니다. 가끔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물이나 국을 엎지른 경우가 있습니다. 옷으로 흘러내릴 아주 긴박한 상황이 아니고 더구나 물 같은 경우는 뭐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님에도 냅프킨 종이를 한뭉치씩 사용하여 닦아내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종업원을 불러 수건으로 처리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는 무감각한 사람을 볼 때 목사가 말은 못해도 마음은 찜찜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는데, 밥을 다 먹어 가는데 좋아하는 반찬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반찬은 아직도 충분합니다. 전 그럴 경우에 갖다 달라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런데 돈 내고 먹고 싶어 먹는게 무슨 문제냐? 하고 큰소리로 반찬 달라고 하고는 남기는 사람. 같이 밥을 먹지만 찜찜합니다. 그런데 왜 식당에서는 그런 경우 적당히 적게 가져오면 좋은데, 대체로 처음 보다 더 많이 갖다 주는지 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 한번 실컷 처먹어봐라. 그런 뜻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
1. 예배 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남기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넉넉하게 보다는 조금 모자란 듯이 가져가시기를 바랍니다. 음식은 매번 먹고 싶은 양의 70%씩만 먹으면 항상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건강의 한 비결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남기지 않도록 주의를 주시고, 또 때로는 어머님들이 아이들에게 많이 먹이겠다는 욕심으로 필요 이상의 음식을 주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데, 그건 집에서나 그렇게 하시고 교회는 남을 배려하도록 해서 보다 적게 가져가는 교육을 시키시기를 부탁드립니다.l
2. 담장을 허물고 꽃밭을 만들자고 하는 제안도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와 있습니다. 환경위원회를 중심해서 관심 있는 분들이 주체가 되어 연구를 하고 교인공청회를 통해 일을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3. 우리 교회에 환경단체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여러분 계시는데, 그분들은 우리 교회 지붕에 태양열 전광판을 달아 에너지 환경보존을 하였으면 하는 제안을 많이 하십니다. 이 경우도 한번 전문가들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하고 실행하였으면 좋겠습니다.
4. 교회에서 수련회를 갈 때 보면 필요 이상의 물건을 구입하여 낭비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간장이나 참기름 조미료 등은 집에서 조금씩 담아오면 좋을 것 같은데, 병채로 구입을 하게 되고, 그리고 각 기관마다 제각기 구입을 하니 필요 없는 소비가 많습니다. 지난해에는 먼저 간 기관에서 남은 것들을 다른 기관이 갈 때 사용하도록 인도를 했습니다만, 좀 더 하느님의 돈을 사용할 때는 자기 돈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더 고민하며 쓰기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남한 교회에서 선교비를 가장 많이 할당하고 있는 교회가 기장 전주 안디옥교회입니다. 자체 선교회에서 백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데, 이교회는 전체 예산의 60% 이상을 선교비로 지출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절약이 있습니다. 우선 목사님부터 승용차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관에 주는 보조금이 거의 없고, 헌금으로는 회식비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먹어야 힘이 나는 기관들이 있습니다. 성가대, 새청, 청신, 주일학교 등 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봉사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털어먹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합니까? 다른 분들이 찔러줘야 합니다. 말로만 찬양이 좋았다고 하지 말고, 우리 아이들 위해서 선생님 수고한다고 공치사만 하지 말고, 집에 좀 불러서 먹이고 그럴 시간이 없으면, 봉투에 넣어서 기관장님에게 회식하는데 보태 쓰세요,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산의 30% 40%를 선교비로 지출하려면 다른 예산도 줄여야 하겠지만, 각자 각자가 자신이 먹고 쓰는 것을 줄여서 교회 헌금 또한 늘려가야 합니다. 만 오천원짜리 옷하고 만 이천원짜리 옷이 있으면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만이천원짜리 사고 삼천원 교회 헌금 하고, 한끼 굶고 구제헌금 5천원 내는 그런 고통이나 불편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불편함 없이 삶의 변화 없는 선교비 증액은 그리 큰 의미는 없습니다. 전 수치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가면 ‘셈치고 선교 헌금’이라는게 있습니다. 길을 가다 커피 한잔 하고 싶은데, 먹었다 셈치고 그 돈 헌금합니다. 오늘따라 만원짜리 삼치회를 먹고 싶은데, 대신 싼 것 먹고 차액을 헌금하는 것. 택시타고 갔으면 하는데, 조금 일찍 나와 버스타고 가면서 택시 탄 셈치고 차액을 헌금하는 것을 셈치고 헌금이라고 합니다. 뭐 그런 의식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있으면서 선교비 증액이 되어야 진정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한테 기분 내면서 한턱들은 잘 쓰는데, 하느님한테 한턱 쓰는 경우는 잘 보지 못합니다. 바라기는 하느님에게 먼저 한턱 쓰고 그 후에 사람에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감사할 일이 생기면 그때그때 성경책에다 헌금하세요. 인간이란게 간사해서 금방 잊어먹거든요. 그리고 셈치고 헌금 주머니는 따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령에 취한 사람들이 되어 주머니를 자주자주 열어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은 감사의 제목에 정비례합니다. 이 이치를 모르면 신앙의 재미가 없습니다. 옆 사람에게 한번 말하겠습니다. ‘우리 부자 되어 주지 말고 주어서 부자가 됩시다. 하느님을 위해 불편하게 삽시다.’
환경주일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환경연대에서 말한 지침 12가지가 여러분 주보에 끼어 있습니다. 이를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그냥 읽지만 마시고 읽으면서 여러분 마음속에 한 가지 이상의 구체적 실천 사항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다 읽고 나서는 옆 사람과 함께 나는 오늘부터 무엇을 하나 실천하겠다. 하는 것을 나누겠습니다.
일, 일회용품을 쓰지 않습니다.
이, 이용합니다, 대중교통
삼, 삼갑니다, 합성세제
사, 사용합니다, 중고용품
오, 오늘도 물, 전기를 아껴씁니다.
육, 육식을 줄이고 음식을 절제합니다.
칠, 칠일째는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바쁘게 살지 않습니다.
팔, 팔지 않습니다. 소비광고에 한눈을
구, 구합니다. 작고, 단순하고, 불편한 것.
십,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겸손합니다.
십일, 십시일반으로 이웃을 돕습니다
십이, 일년 십이개월 성실히 신앙생활합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견사)
참된 신앙인이란 맹목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 열려 있으면서 기꺼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자유와 진리를 외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일 일 일’을 외치는 물질주의적 생활방식과 ‘성장 성장 성장 빨리 빨리 빨리’를 부르짖는 이시대의 생활철학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계십니까?
'명품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응준의 '레몬트리' 중에서 (0) | 2005.08.01 |
---|---|
‘마더’ 의 늙음·성에 대한 고찰 이땅 어머니들의 조용한 지지 (0) | 2005.07.14 |
객관한 능력 -김어준 (0) | 2005.04.20 |
철학자 이정우 [민족] (0) | 2005.04.18 |
철학자 이정우 [악의 보편성] (0) | 2005.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