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가면뒤 국가주의 ‘유령’
한국인은 서구·일본에 짓밟히면서
저항적 민족주의를 꽃피워 왔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극우반공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 는
국민 형성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한-일의 악순환적인 관계,
통일을 둘러싼 남-북 관계,
그 어느 경우든
권력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위험한 개념이란 점을 명심하기를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병이 있어 병명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병명이 있어서 병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대개는 당연히 병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이름이 붙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많은 병들이 우리 눈에 직접 확인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책상을 보고 “저기에 책상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렇게 A라는 병이 우리에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진단 결과들, 그래프들, 숫자들, 증후들 …의 복합체를 특정한 이론적 관점에서 해석해서 A라는 어떤 하나의 병이 ‘존재한다’고 가정되고 거기에 이름이 붙는 것이다. 좀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러이러한 현상들을 하나의 ‘단위’로 구성해서 A라고 하자’라는 합의가 이루어지면 A라는 병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중세 철학에서 ‘보편자들’이라고 불렀던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체들 이상의 단위들은 과연 존재할까? 철수나 영희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보편자는 과연 존재할까? 뽀삐나 검둥이, 해피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개’라는 보편자는 과연 존재할까? 아니면 개체들의 전체 집합을 부르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말,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것일까?
이렇게 어떤 사물의 ‘존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유를 ‘존재론’이라고 한다. 바로 이 존재론적 사유를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존재’들 중 하나가 ‘민족’이라는 존재이다.
‘민족’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까? ‘민족’이란 개체 이상의 존재단위들 중 하나이며, ‘국민’, ‘종족’ 등과 유사한 층위의 개념이자 ‘지역’, ‘인종’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념이다. 이 모두는 인간이라는 전체를 여러 개의 굵직한 존재단위들로 분절하는 방식들이다. 곧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동원하는 각종의 보편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편자들을 분절하는 방식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한 교실에 50명의 사람이 있을 때, 사회계층에 예민한 사람은 그들을 계층으로 분절할 것이고, 성차에 예민한 사람은 남자가 또는 여자가 몇 명인지를 유심히 볼 것이다. 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옷 입은 것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절해 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 전체를 어떤 기준으로 분절해 보는가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다.
국민국가 만들려 ‘인위적 구성’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분절되는가? 사물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일 때, 거기에는 늘 ‘본질’ 개념이 작동한다. 한 개념의 본질 규정에 근거해 그것의 외연이 결정된다. 그러나 규정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바뀔 수 있다. 백조는 흰 새이기 때문에 ‘백조’라 불렸지만,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서 ‘白鳥’(백조)의 본질 규정은 흔들렸다. 생명체들의 경우 오늘날에는 유전자가 중시된다. 그렇다면 한 민족의 본질 규정은 무엇인가? 무엇이 한 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드는가?
‘민족’이라는 존재 단위는 대단히 모호한 단위이다. 사람들은 민족이라는 것이 마치 한 사람의 개인이 존재하듯이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민족이라는 단위는 대부분이 극히 모호하고 허구적인 것들이다. 앞에서 우리가 병에 관련해 이야기했거니와, ‘민족’이라는 존재는 명확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관점을 통해서 구성되는 존재이다. 혈통, 언어, 문화, 지역 … 등 갖가지 기준들이 존재하지만, 그 기준들을 조합하는 방식은 다 다르고,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 객관적으로 분절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서 그런 존재 단위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연구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특정한 민족의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은 위태로워진다. 수천 년, 수만 년을 보존해 온 ‘한’ 민족의 동일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가 밝혀지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사상가인 에른스트 르낭은 “망각과 왜곡은 국민(國民) 형성의 본질적 요소들이다. 역사 연구의 발전은 국민 개념을 위태롭게 한다”고 했다.
르낭의 이 말에서 ‘국민 형성’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란 결국 국민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동원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왜 국민 형성에 민족이 중요한가? 하나의 국민이 형성되려면 숱한 사람들, 정말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개인들을 ‘국민’이라는 어떤 인위적인 존재, 구성된 존재 속으로 쓸어 담아 거기에 어떤 확고한 동일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려면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할 수 있는 것, 곧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동원해서 국민 개념을 밑받침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위적으로 구성된 ‘국민’을 밑받침하는 어떤 실체가 필요한 것이다. ‘민족’이라는 존재는 바로 이런 실체로서 동원되는 개념이다. 하나의 국민이 확고한 동일성을 갖추려면 지역적 구획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의 동일성을 유지해 왔다는 어떤 보증, 숱한 세월 속에서도 ‘하나의’ 그 무엇으로서 살아 왔다는 보증이 필요하다. 바로 그 때 ‘민족’이라는 개념이 동원되기 시작한다.
물론 민족이라는 개념을 덮어놓고 허구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일정한 지역에서, 같은 말과 같은 풍속·문화·관습을 지니고서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살아간 사람들을 어떤 하나의 단위로 묶어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경우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족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조차도 혈통·언어·관습 … 등에서의 복잡한 이질성이 혼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확고하게 보였던 동일성이 금방 와해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 개념을 인정하는 경우에조차도 그것이 매우 모호하고 복잡한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곤란하다.
저항적 민족주의는 정당성 확보
그러나 문제는 누가 어떤 목적에서 하나의 민족, 한 민족의 동일성을 구성하는가, 민족 개념을 과장하고 조작하고 이용하는가이다. 이들은 곧 근대 ‘국민국가’를 구성하려 했던 집단들이다. 서구의 경우 중세 가톨릭 사회가 무너지면서 유럽 사회가 다원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구성하려 했던 주체세력들이 민족 개념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여러 차례에 걸쳐 복잡하게 전개되며,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사회주의, 제국주의 … 등 여러 흐름들과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관계를 맺으면 전개된다.
민족주의는 때때로 외부의 침입에 대응하면서 형성되기도 한다. 민족주의가 존재하고 그것이 외부에 대항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외부라는 것이 침입하면서 그것에 대항하는 내부로서의 민족 개념이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말하자면 ‘저항적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적 민족주의도 순식간에 폭력적 민족주의로 둔갑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역시 서구라는 외부, 근대성이라는 외부에 직면해 메이지유신을 통한 근대 국민국가/민족국가에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시작된 민족주의는 역으로 서구가 자신들에게 했던 짓을 동북아의 다른 지역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하는 비극을 낳았다. 자신이 당했기에 타자는 그렇게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그대로 타자에게, 자신을 가해한 타자가 아니라 다른 엉뚱한 타자에게 가해하는 인간사의 비극은 일본의 경우에 선명하게 확인된다.
조선이라고 하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볼 때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견고한 동일성을 갖추고서 살아 왔던 한국인들은(물론 ‘한국인들’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구성물이지만) 현대에 들어와 서구와 일본에 짓밟히면서 저항적 민족주의, 피해적 민족주의를 꽃피워 왔다. 적어도 이 저항적 민족주의, 민중들의 자연발생적 민족주의는 역사적 정당성을 담고 있다.
권력 입맛대로 악용할 수도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및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극우반공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국민 형성’의 수단으로 계속 이용되어 왔다. 국민국가를 떠받치는 메커니즘으로서 정권들은 민족 개념을 악용해 왔으며, 서구와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에 젖은 사람들의 심리를 적절히 활용했다. 민족주의는 다양한 성격과 형태가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라도 반민중적 민족주의 곧 국가주의로 이용되기 일쑤다. 전두환이 일으켰던 ‘국풍(國風)’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악순환적인 관계, 통일을 둘러싼 남한과 북한의 관계, 근대가 이루어놓은 삶의 양식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탈근대적 사유들과 몸짓들,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비롯해 각종 문제들은 모두 민족주의와 직간접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그 어느 경우든 민족주의는 언제라도 권력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위험한 개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soyowu@yahoo.co.kr
'명품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Imago Dei 로서의 책임적 존재 (0) | 2005.06.13 |
---|---|
객관한 능력 -김어준 (0) | 2005.04.20 |
철학자 이정우 [악의 보편성] (0) | 2005.04.18 |
철학자 이정우 [타자] (0) | 2005.04.18 |
철학자 이정우 [기억] (0) | 2005.04.18 |